그놈의 바른 자세가 뭐라고 (2)
피부로 느꼈던 똥군기의 위대함
동아리 내 비호감 1순위였던 나는 동아리 방에 갈 때마다 눈치를 봤다.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인사를 안 받아주지는 않을지,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대강 받아주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물론 걱정한 대로 선배들은 내 인사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웬만해서는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안 보던 눈치도 한껏 보고, 행여나 미움 사지는 않을까 말을 가려서 하면서,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동아리 방만 들어가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직 정식으로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진 않은 상태였다. 한참 선배부터 얼마 차이 안 나는 선배들까지 모두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인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방식은 PT 발표와 유사했다. PT에 각자의 소개를 담아, 한 명 한 명 모두의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속했던 기수는 여러모로 화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팀이었다. 어딜 가나 한 명이 꼭 분위기를 흐리듯이, 그 한 명이 참 독선적이었다. A라고 하겠다.
PPT를 만들기 위해 다 같이 의논을 했었다. 디자인은 어떻게 할 건지, 내용 구성은 어떻게 할 건지 등 전체적인 틀은 공동으로 짜고, 개인 내용은 개인이 알아서 넣기로 했다. 조별 과제하다 보면 늘 있는 독불장군이 A였다. 처음에, 신경질 부리는 그 사람을 보고 피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참 강했고, 남의 말도 잘 안 들었다. 만약 본인이 이거저거를 하자고 말해놨으면, 다른 사람이 이에 딴지를 걸면 다 하나하나 반박하고 아예 듣질 않았다. 특히 나한테는 더욱 그랬다. 난 거기서 개밉상이었으니까.
내가 의견을 내면 계속 무시했다. 뭔 말을 해도 듣는 시늉도 안 하고, 그냥 씹어버렸다. 대놓고 무시하려고 내가 말을 끝내면 바로 자기 의견을 말했다. 기 센 독불장군이 그러니, 다들 내 의견을 들어주질 못했다. 나는 철저히 팀에서 무시당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그러니,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A는 기껏해야 1년 선배이고, 빠른 년생이라 일찍 학교에 들어가서 나랑 나이로는 동갑이었다. 생일이 나보다 딱 한 달 빨랐다. 그래서 더 기분 나빴다.
내가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다른 일 때문이었다. 팀원들끼리 7시에 회의를 하기로 약속했다. 7시까지는 동아리 방에 오는 것으로 정해서, 10분 전에 도착하려고 시간을 맞춰서 갔다. 한창 학교로 가고 있는 중, 약속시간 40분 전쯤에 전화가 A에게서 왔다.
A: "너 어디냐? 왜 안 와?"
"저 지금 가고 있어요. 늦지 않게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A : "야, 미리 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선배들 다 와서 하고 있는데"
"아.. 죄송합니다. 빨리 가겠습니다"
아직 약속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왜 아직 안 와 있냐고 갈구기 시작했다. 가면서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일단 참았다. 예상대로 약속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다. 동아리 방에 들어가니, A와 같은 기수 다른 선배 2명 정도가 와 있었다. 말과는 다르게 다 도착해있진 않았다. 내 동기들도 도착 안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난 바로 밖에 불려 나갔다. "야, 밖으로 따라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 앞에서 담배를 푹푹 피우며 말 그대로 꼬라(?) 보고 있었다. 난 혼나겠구나.. 생각하며 긴장한 상태였다. 바로 쪼기 시작했다.
A : "너 미친 거 아니냐? 선배들 다 와 있는데 시간 맞춰서 오는 게 어디 있냐?"
"7시에 다 같이 모여서 회의하자고 들어서.. 7시 되기 10분 전에 도착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A : "야, 다 너보다 선배인데, 1시간 전에는 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 한 시간? 어이없었다. 어차피 다 같이 모여야 회의가 진행되는데, 후배라고 1시간 전에 와 있으라고? 듣자마자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똥 같은 소리인가. 내가 살짝 웃으니, 꼬라보는 눈빛으로 나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A : "야, 똑바로 안 서? 열중쉬어, 차렷. 말하는데 안 하냐?"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열중쉬어 차렷을 시키다니.. 게다가 군대도 아니고 무슨 느닷없는 제식훈련인가. 군대도 안 갔다 온 인간이. 군대 제식이라곤 할 줄도 몰랐던 인간이... 그래서 안 했다. 열중쉬어하는 척하다가 어이없다는 표정 지으면서 딴청을 부렸다. 그러더니 자기도 어이가 없었는지 A는 웃었다.
A : "하여튼, 같은 기수여도 학번으로는 너보다 선배들이니까, 넌 약속시간보다 1시간 일찍 와 있어. 알겠어?"
이렇게 한 번 혼이 나고부턴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이때부터 때려치워야 하나 말아야 되나 매일 고민했었다. 동아리 내 같은 기수 안에서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윗 기수 선배들은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된다는 것처럼,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가만히 놔두고 있었다. 그 선배라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참 회의감을 느꼈다.
동아리 활동에 의욕을 잃어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기 시작했다. 의견도 얘기 안 하고, 그냥 말도 안 하고, 조용히 할 일만 했다. 그 스트레스를 집에서 투덜투덜 대며 풀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1시간 미리 와 있으라는 게 말이 되냐..." 하루 종일 짜증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미운 사람인가 싶었다. 이때부터 감정의 감옥이 조금씩 세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고, 나 자신을 사람들과 분리시키게 만들었다.
계속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동아리 방에 있으니, 처음 소개해줬던 선배가 보기에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나를 따로 불러서 동아리에 대한 비밀을 얘기해주는데...
OT 때 했던 실수 하나 때문에 처음부터 계속 무시당하고 신경질적인 대우를 받다 보니 자존감이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미움을 당할 사람인 건가, 나는 사람들과 못 어울리는 부적응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대인관계에서 상처를 받다 보니, 나중에는 이상하게 나 자신을 탓하게 되었다. 나를 그렇게 갈궜던 A가 나쁜 꼰대라고 생각하기보단, 내가 진짜 버릇없고, 예의 없는 사람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나 자신이 선배들이 하나 같이 싫어할만한 사람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타인을 조금씩 피하게 되었다. 인간관계가 참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타인에게 계속 상처를 받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게 된다. 비합리적인 관계에서는 일단 먼저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일단 자신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해야 건전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시 나는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 건 아닐지, 내가 이상한 사람이어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인지 불안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계속적으로 나를 책망했었다. 남보다 나에게 가장 많이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은 본인이 먼저 챙겨야 한다. 내가 내 자존감을 보호하지 않으면,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타인의 마음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본인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신경 쓰지 않는다. 모두가 공감능력이 높아서 타인의 마음에 신경 쓸 줄 안다면, 타인에게 상처 줄 수 있는 말을 작금의 현실처럼 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 협력하면서 기분 나쁠 일은 없을 것이고, 모두가 협력을 기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지, 다른 이에게 불쾌감을 주진 않을지 먼저 걱정하지는 않는다. 일단,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비합리적인 관계에서는 일단 내가 내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감정의 감옥에 빠지지 않고, 많은 이들과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나하나 쌓여 가는 감정적 상처는 두려움을 양산한다. 미움을 살까 두렵고, 그래서 인간관계가 두려워지고, 그러다 보면 타인과 어울리기를 의도적으로 피하게 된다.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행하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반응이다. 이런 식으로, 감정적 상처가 하나의 심리적 감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난 이때부터 감정의 감옥에 빠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인간관계를 멀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