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공무원 임용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상사가 불합리한 지시를 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요?" 규정에 어긋나는 등 불합리한 지시의 경우 따르지 않는다는 의견을 논리적인 사유를 들어 소신껏 말하는 것이 모범답안이라는 것도 들었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는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누가 보기에도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몇 년 해본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질문과 같은 일을 막상 실제로 겪어보면 저런 소리가 입 밖으로 잘 안 나온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으니까.
조직 내에서 불합리한 지시를 거부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작든 크든 어떠한 그룹을 이끄는 리더들도 가슴속에 가지고 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속한 부서의 부서장도 CEO의 불합리한 지시에 제대로 된 항변을 하지 못했고, 다른 부서장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지시를 전해받아서 실제로 실행에 옮겨야 했던 나도 쉽게 거부하지 못했으니까. 어떠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내 머릿속의 문장을 차마 뱉지 못했고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많은 순간적인 고민들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다른 부서로 쫓겨나지는 않을까, 지금 부서장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고 함께 계속 잘 지낼 수 있을까, CEO에게 어떤 해코지를 당하는 건 아닐까 등 개인 신변에 대한 걱정과 사내 평판 악화에 관한 두려움이 나를 옥죄었고, 결국 내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제도에 대한 욕심이 강한 CEO는 현 법령 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계약방법을 만들어내려는 의도를 처음부터 갖고 우리 기관에 왔고,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본인이 큰 틀에서 생각하고 있던 계약자 선정방법을 구체적으로 고안해내라는 지시를 몇 달 전 했었다. 아이디어로만 존재했었던 것이 구체적인 실행방안으로 만들어졌다. 연차가 높은 선임들은 민원발생과 감사지적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아이디어의 구체화 작업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CEO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한 부서장들이 결국 직접 방안을 만들게 되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CEO 실에선 고함이 들리곤 했고, 소리 지르는 CEO의 앞에서 간부들은 지시를 따를 수 없다는 항변을 하지 못했다. 단지 빨리 하겠다 같은 뻔한 복종의 표현과 어떻게든 법령위반을 피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려서 현실적으로 시행이 불가능할 만한 방안들을 제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감사를 피하기 위해 간부들이 머리를 써서 감사기관에 사전질의를 하기도 했지만, 하지 말라는 답변만 올뿐이었다. 통상적으로 이런 경우에 시행을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공기관의 모습이지만, 이번 CEO는 포기하지 않았고 강행을 계속 지시했다. 더 크게 소리치고, 더 자주 신경질을 내면서 말이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여러 사업부서와 계약부서의 장들은 피해 갈 방법이 없으니 결국 실무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머리를 싸매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그리고 감사권한이 있고 실질적으로 우리기관을 통제하는 상위기관과 감사기관들이 현행 법령 위반이니 시행하지 말라고 한 새로운 계약방법을 실제 시행하는 일은 나에게로 던져졌다. 계약업무를 맡은 지 반년도 안 된 초짜에게 사후에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계약방법을 실행하라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결국 나만 죽을 것이란 비관적인 생각도 들었다. 여긴 사기업도 아닌데, 진급할 만큼 하고 회사 다닐 만큼 다닌 간부들이 불이익을 받아봤자 무슨 악영향이 있겠나, 앞으로 경쟁하며 진급할 일이 많은 나만 쓸데없는 일로 징계를 받아 불행해질 것이 뻔했다. 아이디어를 내가 고안해내진 않아도 실제로 실행은 내가 했으니 나도 공범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어 하는 순간 상황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불합리한 지시는 말 잘 들을 거 같은 만만한 내가 수행하면 된다는 간부들의 믿음에 따라 내 앞으로 그 업무가 떨어졌다. 항변할 기회는 당연히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당당하게 시킬 뿐이었다.
차마 입 밖으로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내가 거부하면 부서장과의 관계가 틀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한동안 계속 같이 지내야 하는데, 매일매일이 감정적으로 불편해질 것 같았다. 심하면 이유 없는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인사조치가 시행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상황의 정점에는 CEO가 있을 것이다. 직접 지시하든, 간접적으로 압박하든 CEO가 나를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지시불이행에 관한 사내의 부정적인 평판도 걱정되었다. 연차도 낮고 나이도 어린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이리저리 둘러봐도 선배들밖에 없고, 각자도생, 이기주의, 상명하복 문화가 강한 회사라 나를 공격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불합리한 지시를 거부한다는 건, 나 같은 사회초년생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별다른 말없이 나는 부서장이 시키는 대로 새로운 계약방법을 실행에 옮겼다. 그래도 상황은 다행스럽게 돌아갔다. 입찰공고를 올리고 얼마 되지 않아 감사기관에서 연락이 오며 압박이 들어왔고, 퇴근한 상태였는데 부랴부랴 한밤중에 회사로 다시 출근해서 이전에 올려놓은 공고를 취소하게 되었다. 며칠 뒤엔 감사기관에 불려 가서 호되게 혼나며 한 소리 듣기도 했다. 그렇게 CEO의 부당한 지시는 일단 실행이 중지되었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서장들이 내가 CEO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경우들이 종종 생겼다. 크고 작은 행사에 CEO와 가깝게 동행하게 한다거나, CEO와 독대할 기회를 틈틈이 만들려고 한다든가 등 자꾸 CEO와 소통할 기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곤 했다. 윗사람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점수부터 따라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내 생각을 죽여가면서까지 점수를 따고 싶지도 않고, 떳떳하지 못한 채로 비굴하게 복종하며 이쁨 받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삶은 불행하다. 더욱더 불행해지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