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정 (4)
기업이나 기관에서 주관하는 대외활동은 취업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지원자는 이력서 활동사항에 한 줄을 채움으로써 지원 직무에 대한 관심과 전문성을 나타내거나, 집단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강조할 수 있다. 아니면, 단순히 '나 열심히 살아왔음'을 어필할 수도 있다. 자기소개서에는 대외활동 스토리를 녹여내어,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함께 우수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다. 채용 심사관은 이를 통해 지원자의 사회성, 협동능력, 문제해결능력 등의 우수함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만큼 대외활동은 취업에 있어 중요하다. 내가 대외활동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당연히 첫 번째는 취업에 도움이 되니까. 두 번째는 집단활동을 해볼 수 있어서였다. 인간관계는 상대방과 한 집단에 함께 소속이 되어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소속이 없는 자유로운 신분에서 서로 만난다면 부딪히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집단 내에 속해 있다면 다툼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위아래가 명확히 구분된다. 조직원들이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고,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으며, 만나기 싫은 사람과도 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나중에 직장생활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조직생활에 대해 미리 연습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외활동은 다수의 사람들이 한 팀이 되어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각자 역할을 수행하고, 일정기간 동안 꼴 보기 싫든 아니든 만나야 한다는 점에서 직장생활과 유사하다. 대외활동을 통해 조직생활 적응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4학년 1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올해 2월, 난 한 대기업의 대학생 자원봉사단에 지원했다. 지역에 있는 기관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원봉사를 하는 프로그램을 대학생들이 기획, 운영하는 대외활동이었다. 여러 팀 중 하나를 골라 지원할 수 있었고, 팀 별로 참여인원, 자원봉사 대상 및 장소,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콘셉트가 정해져 있었다. 합격자는 자원봉사단의 일원으로서 콘셉트에 충실해서 프로그램의 세부 내용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되는 것이었다. 기획보다는 운영의 비중이 커서 부담감이 크진 않았다. 그래도 도전하는 것은 정말 두려웠다. 어렵고 힘들까 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알바 지원이나 자원봉사 신청처럼 다른 사람과 어울려야 하고, 부딪혀야 한다는 점이 나를 흔들었다. 특히 팀을 이루어 움직여야 한다는 게 가장 맘에 걸렸다. 과 동아리에서 그랬듯, 팀원에게 미움을 사고 따돌림을 당할까 봐 무서웠다. 그래도 용기 내어 지원은 했다. 서류통과에 이어 전화면접까지 통과해야 최종 합격을 할 수 있었는데, 어차피 서류통과가 안되면 합격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설마 나 같은 애를 붙여주겠어?'란 부정적인 생각 덕분에 그나마 쉽게 지원이 가능했다. 관련 경험이 없는 나는 매력적이지 않은 지원자로 보일 것이라 예상했다. 붙지도 못할 걸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근데 큰일이 났다. 서류통과가 된 것이다. 이게 아닌데... 붙은 게 아까워서 전화면접도 떨리지만 그냥 봤다. 어찌어찌 최종 합격을 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나 같은 애를 대체 왜 뽑은 건지 의문만 가득한 채, 몇 주 뒤 OT에 참석했다.
팀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주최 측은 서로 친해지라고 팀 소개 영상을 찍게 하기도 했고, 앞으로 진행할 프로그램의 큰 그림을 그리게 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몇 시간 동안 팀원들과 부딪히니 기가 빨렸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많이 해보지 못했고, 낯선 사람과의 대화 자체에 서툰 나로서는 팀원들 사이에 섞여있는 것도 힘들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했다. 팀 영상 제작과 프로그램 기획은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긴장되니 아무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말도 잘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너무 말을 안 하면 열심히 안 한다고 욕할까 봐 꾸역꾸역 말을 내뱉었다. 실없는 아이디어라 생각해도 그냥 말했다. 열심히, 성의껏 한다는 이미지를 보여줘야 했으니까. 너무 신경을 많이 썼는지 그날 점심은 반밖에 못 먹었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이라니. 집에 가서 바로 뻗어서 잤던 기억이 난다.
프로그램은 매주 금요일 오후마다 진행되었다. 우리 팀은 지역 사회복지관에서 독거노인을 상대로 요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팀이었다. 어르신들과 함께 요리를 하고 먹으면서 노인 소외 문제를 해결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같이 요리하고 먹으면서 노는 게 주된 일이었다. 4~5명 정도 되는 어르신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체조를 하며 몸을 풀고, 요리를 같이 하고,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팀원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어르신께 다 같이 인사를 하더라도, 스킨십을 하면서 꼭 남들보다 몇 마디를 더 건네면서 친근하게 다가갔다. 게다가 프로그램 MC를 맡았었는데, 마치 대본을 보고 하듯 자연스럽게 말이 술술 나왔고, 과장된 행동을 해서 모두가 지루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팀 리더는 사람들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했다. 카리스마가 넘쳤고, 자기주장을 곧잘 말했다. 결단도 참 빨랐다. 어떤 팀원은 따뜻한 마음씨로 어르신들께 늘 웃으며 다정하게 대했다. 점심은 드셨냐는 평범한 말도 참 상냥하게 건넸다. 어떤 팀원은 능청스러운 행동으로 이쁨을 받기도 했다. 낯을 가린다면 쉽게 저지를 수 없는 말장난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장난스럽게 치곤 했다.
모두 내가 가지지 못한 모습이었다. 난 조용하고, 어색해하고, 굳어 있는 사람이었다. 어르신을 상대하는 것도 처음, 여러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도 처음, 밝게 웃고 활발하게 행동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것도 처음이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참 힘들었다. 적극적으로 먼저 말을 건네지 못했고, 대화를 하다 중간에 끊기는 횟수가 많았다. 잘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 것도 어색해서 뒤에서 주저하기 일쑤였다. 어딘가에 숨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었다. 삐걱삐걱 움직이는, 감정표현이 서툰 인간형 로봇이 된 것만 같았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마다 너무나 아쉬웠다. 왜 합격해가지고 이 고생을 하나 때로는 후회하기도 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계속 그랬다간 어색해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르신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조금씩 팀원들을 보며 배웠다. 요리하기 전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는 "점심 뭐 드셨어요?", "요즘 별일 없으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리할 때 어르신들에게는 잘한다고 무조건 칭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사는, 올 때는 "오셨네요 어르신", 갈 때는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말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상황별로 팀원들과 어르신들을 관찰하며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감각을 익혔다. 생각보다 타인과 어울리는 일에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체득해나갔다.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부터는 어르신들, 팀원들과 어울리는 일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말과 행동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체조를 할 때 어르신과 눈을 맞추며 활짝 웃는 여유가 생겼다. 손뼉을 칠 때 팔을 더 크게 움직여도, 웨이브를 탈 때 몸을 더욱 흐물거려도 창피하지 않았다. 요리를 하며 "부침개를 1초에 한 번씩 뒤집으시네요?"라고 장난을 칠 수 있게 되었다.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떠나가시는 어르신께 "감기 조심하세요"라는 말도 덧붙일 줄 알게 되었다. 팀원들이 모여서 회의할 때, 의견을 제시하고 맞장구 쳐주는 횟수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마치, 두 발 자전거를 배우면서 넘어져도 계속 연습을 하다 보면 결국 잘 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연습을 하면서 실력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적응해나갔고,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여유가 생기니, 봉사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부담감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만족도가 올라갔다. 태어나서 타인을 통해 행복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볼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매주 행복했다. 봉사활동을 끝내고, 집에서 가족들에게 소감을 얘기할 때 나도 모르게 "요즘 행복해"라는 말을 했었다. 한 팀원에게는 "정말 오랜만에 행복을 느껴보는 것 같아. 봉사를 끝내고 나면 되게 행복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쑥스러울 수 있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했던걸 보니, 진심이었던 것 같다. 과거에, 자원봉사를 하며 행복을 느낀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TV로 보며 이해가 안 됐었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정을 느끼는 것, 누군가를 즐겁게 해 주면서 나도 즐거워지는 것. 프로그램을 했던 약 2달 동안 느껴보니, 내가 지금까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살아왔었나 자연스럽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진정한 행복을 너무 모르고 살아왔었다.
프로그램은 정말 뿌듯하게 마무리되었다. 프로그램을 매주 진행하면서 평소에 자주 먹는 다양한 음식들을 만들어보았다. 중간에 한 번 날씨가 좋은 날에 근처 공원으로 소풍을 나갔다 오기도 했다. 마지막 주차엔 롤링페이퍼를 돌리고, 팀원들의 마지막 인사가 담긴 닭살 돋는 동영상을 어르신들께 보여드리고,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드렸다. 물론 마지막이니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먹기도 했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어르신들과 함께 추억을 쌓으며 서로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올해 봄은 지금까지 겪어온 어느 해보다도 따뜻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잊고 있었던 내 진정한 욕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도 여러 사람 앞에서 활발하게 행동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 하고, 사람 간의 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라도 따뜻한 말을 상대방에게 더 건네고 싶어 했고, 내 말을 들으면서 고마워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타인이 두려워서 표현하지 못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늘 진정으로 원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내 욕구를 너무 억제하면서 지내왔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너무 못하면 결국 병이 난다. 나는 영원히 사회와 단절하여 지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도전해야만 했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감옥에 갇혀 오랫동안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면, 누군가와 교류하는 일에 서투를 것이다. 타인과 어울리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돌이 안 된 아이가 걷기 위해 먼저 서는 연습을 하고, 설 수 있게 되면 한 발자국씩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타인과 진심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는 급하지 않게 순차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먼저 다가가 보고, 함께 있어보고, 상황에 맞게 말하고 행동해보는 것. 누군가에게는 쉽고 일상적인 일일지 몰라도, 나처럼 감정의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는 많은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결국 연습만이 살길이다. 연습을 통해 성장해가야 한다는 숙명은 모두에게 부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