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은 아니지만 최선도 아닌 삶

9. 부정적인 사람

by 빨간모자

'인생은 타이밍이다', 누구나 흔하게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그리고 누구나 살다 보면 그 순간에 잡지 않으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기회를 맞닥뜨리게 되곤 한다. '그땐 그랬었지...' 하며 별 탈 없이 그냥 넘기기도 하고, 지나고 나서 뼈저리게 후회하기도 한다. 나에게도 참 안타까웠고, 아까웠던 일들이 많았다. 그중 '기회'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끔씩 이유 없이 떠오르는 경험이 있다.


대학교의 학기가 시작하고, 수업에 처음 들어가 보면 괜찮은 사람이 한 강의에 한두 명씩은 보이기 마련이다. 그냥저냥 괜찮다면 우연히 지나치면서 한두 번, 수업할 때 한두 번 쳐다보고 만다. 하지만 정말 강하게 호감이 간다면, 이유 없이 계속해서 시선이 가게 된다. 그때의 그 수업에서 발견했던 그 사람은 틈날 때마다 시선이 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것은 나에겐 꽤 자주 있던 일이었다. 대부분은 내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걸 그 상대방은 모른다. 가끔 통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희귀한 케이스였다. 그래서 나는 늘 80% 정도는 포기한 채로 누군가를 혼자 좋아한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은 일주일에 딱 한 번, 한 강의에서 볼 수 있었다. 첫 시간에 깜짝 놀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 앉아 있길래 시도 때도 없이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수업을 들으면서, 눈을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계속 향했다. 힐끔힐끔 보다가 그 사람의 길고 이쁜 손가락을 집중해서 보기도 했다. 하도 쳐다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내 시선을 의식하는 듯했다. 나를 한 번 보더니, 자신의 손을 펼쳐서 관찰했다. 내가 손을 계속 쳐다보니 손에 뭐라도 묻었나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첫 주가 지나가고, 3주 째까지는 몰래 티 안 나게 보기만 했었다.


대학생들은 잘 알겠지만, 대학생들이 정말 자주 이용하는 앱이 하나 있다. 학교별로 학생들이 온라인 상에 모여 서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정보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앱이다. 어느 날, 여러 게시판들 중에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익명으로 표현하는 게시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책의 대나무 숲 같은 거랄까. 어차피 익명이기도 했고, 호기심에 한 번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서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내가 쓴 글을 그 사람이 못 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기에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내용으로 쓰기로 했다. 3주 정도를 지켜보면서 남들과는 다른 그 사람만의 외적인 특징을 몇 개 짚어낼 수 있었다. 키가 작고 말랐으면서, 매번 파란 캡 모자를 쓰고, 어두운 색 옷을 자주 입으면서, 귀고리를 항상 두 귀에 착용하고 오는 어떤 분, 수업 때마다 보는데 참 마음에 든다는 내용으로 글을 썼다. 혼자 키득거리며 글을 올렸고,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냥 혼자만의 즐거움만 가득했을 뿐이었다.


다음 날, 그 수업에 참석했고, 매주 그랬듯이 흘끔흘끔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이전보다 눈이 더 자주 마주쳤다. 전에는 나만 쳐다봤다면, 그때는 그 사람도 나를 쳐다보며 의식했다. 마치 과거에는 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아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 그 사람도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쳐다보면, 그 사람이 이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그런 일이 발생하니까 순간적으로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 글 읽었나 보다'


내가 쳐다보고 그 사람이 쳐다보는 그런 일들은 매주 발생했다. 수업하다가 힐끔 보고 눈을 피하면, 그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가보면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 오고 강의실에 들어오며 그 사람을 쳐다보면, 나를 의식하고 있지만 딴 데 쳐다보며 나를 안 보는 척을 하는 느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내 바로 뒤에 앉아서 내가 친구에게 하는 농담에 혼자 키득키득 웃기도 했다. 가끔은 강의실 바깥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친구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휙 하고 쳐다보니,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다가 안 본 척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 날은 건물 바깥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길 옆에 서있던 그 사람이 계속 나를 쳐다보다 딴 데보다 하길래, 나도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하며 옆으로 지나가려 했다. 스치는 그 순간에 얼굴이라도 제대로 보고 싶어 고개를 돌려 쳐다봤는데, 그 사람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쳐버렸다. 내가 쳐다보고 싶었던 것처럼 그 사람도 쳐다보고 싶었나 보다. 그러곤 당황해서 서로 안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조금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걸어가면서 계속 뒤를 쳐다볼 순 없어서 고개를 다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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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직감적으로 진작에 알아차렸다. 눈이 자주 마주치는 것도 단서였지만, 유독 그 사람의 시선에 무게가 실려있다는 느낌을 자꾸 느끼면서 알 수 있었다. 감정이 실린 눈빛은 공허한 눈빛과는 다르게 받는 이가 정해져 있어서 그런지, 계속 내 마음에 전달이 되었다.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마음으로는 느꼈지만, 정말 확실하게 믿음을 가질 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아마 그때의 나에게는 어떠한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원래 성격이 부정적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유독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에 관해서는 특히나 더 부정적이었다.


늘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고 있지만 표현하지 않고 있었다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으로 느끼면서도 그것은 나의 크나큰 착각이라고 믿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부정할 뿐이었다. 이게 문제였다. 부정할 거면 이유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유가 없었다. 맹목적으로 부정하고, 의심했다. 그렇게 나는 매번 기회를 잃었다. 도전조차 하지 않았다. 도전했다면, 물론 실패했을 수도 있지만, 성공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전을 애초에 하지 않았으니, 시작하기도 전부터 실패 가능성과 성공 가능성을 모두 포기한 셈이 되었다. 무슨 일종의 버릇처럼 늘 그랬다.


반대로 부정적이어서 좋은 점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인턴 경험을 두 번 했었다. 대부분의 취업준비생들은 직장생활에 대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꿈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좋은 곳이라 얘기하는 직장에서 주어진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며 높은 연봉을 안정적으로 받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인생이 주체적이고, 멋있고, 의미 있는 삶일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인턴으로서 근무하는 취업준비생들은 대부분 열정이 가득하다.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고, 늘 뿌듯해하면서 회사를 다닌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한 채로 말이다.


나는 그 반대다. 내 꿈은 원래부터 글 쓰며 먹고사는 사람이었지, 직장인이 아니다. 금융이니 마케팅이니, 많은 학생들은 자신이 종사하고 싶어 하는 직무가 마음속에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금융, 일반사무 등 그런 직무 자체에 관심이 많지 않고, 회사에 속해서 일하는 것도 사실 싫어한다. 근무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조직생활을 잘한다고 했지만, 그걸 떠나서 그냥, 나는 혼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로지 글로만 먹고사는 일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직장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인턴 경험을 쌓았던 것이었다.


같이 일했던 인턴도 그랬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의 취업준비생들은 대부분 조직에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고 싶어 하고, 조직생활이 어떤 것인지 짧게나마 경험하고 싶어 한다. 추가적으로 정규직 지원에 대한 현실적인 정보들을 듣고 싶어 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회사의 업무와 분위기를 경험하며 경험을 쌓은 뛰어난 지원자가 되려 하고, 때로는 자신이 일하는 곳의 직원이 되고 싶다며 희망을 품기도 한다. 모두가 회사의 좋은 점만 바라보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의 좋은 점만 보려 한다. 조직에서 단점을 잘 숨기기도 하지만, 본인들이 볼 생각이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나는 반대로 부정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찾았다. 일단 연봉, 복지 등의 흔하게 공유되는 정보는 대외적으로 공개가 되어있다. 고용안정성이 높은지 낮은지 정도도 충분히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고, 회사의 성격에 따라 예상이 가능하다. 그런 흔한 정보 대신, 그 회사에서, 현장에서 일해야만 알 수 있는 숨겨진 정보들을 알고 싶었었다. 게다가 나는 직장인이 첫 번째 꿈이 아니다. 그래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쁜 회사를 거르는 게 더 중요하다. 좋은 직장을 고르기 위해 인턴 생활을 한 게 아니라, 똥을 걸러내기 위해 인턴 생활을 한 셈이다. 일을 직접 해보면서, 업무적으로 어떤 면이 나와 안 맞는지 찾으려고 했다. 조직문화 중에서는 어떤 점이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지 찾아내려고 일부러 직원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기도 했다. 또한, 직장생활의 어두운 면을 좀 더 다양하게 접하기 위해 일부러 서로 상반된 성격의 두 회사에서 일을 했다. 한 곳은 연봉과 복지가 좋고, 많은 사람들이 알 만큼 유명한, 규모가 큰 공공기관이었고, 나머지 한 곳은 연봉과 복지가 적고, 인지도도 별로 없고, 규모가 작은 공공기관이었다.


단점을 집중적으로 찾다 보니, 하나둘씩 눈에 보였다. 그리고는 결국, 남들이 좋다고 하는 회사가 꼭 좋은 건 아니고, 남들이 별로라고 하는 회사가 꼭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봉이 높은 첫 번째 회사는 커피를 마실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면서 업무가 상당히 어려운 편이었다. 업무량 자체가 많기도 했지만, 여러 업무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야근도 잦았고 규칙적이었으며, 거의 대부분 강제로 이루어졌었다. 괜히 연봉이 높은 게 아니었다. 게다가 유명하다 보니 경쟁이 직장 안팎으로 심했다. 똑똑한 인재들이 회사에 많다 보니 웬만큼 똑똑해서는 조직 내에서 성공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규모가 크면서 회사가 오래되었다 보니 조직문화가 상당히 보수적이기도 했다. 아직도 술잔 돌리기가 일부 윗사람들을 통해서 성행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선후배끼리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경직된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일하면서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두 번째 회사는 연봉이 낮은 대신 일이 적었고, 업무 난이도도 쉬운 편이었다. 필요한 때에만 야근이 이루어졌고, 대부분 제때 퇴근을 했다. 인지도가 적은 이유로 채용 지원자 수가 적으면서 지원자 수준이 높지 않은 편이었다. 내부적으로 경쟁이 심하지도 않았고, 많은 노력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규모가 작은 것에 비해 문화가 의외로 보수적이지 않았고, 하급 직원들의 의견이 잘 받아지는 편이었다. 직원들끼리 친근감이 높았고, 서로 챙겨주는 모습도 틈틈이 보였다. 게다가 워라벨이 잘 지켜지는 곳이었고, 기본적으로 윗사람들이 워라벨을 선호하는 분위기였다. 유명하지 않길래 별로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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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연봉을 선호하고, 업무적으로 성장 욕구가 강한 도전적인 사람이라면 첫 번째 회사가 어울리겠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어 하고, 컴퓨터 모니터를 13년째 아직도 쓸 정도로 돈과 물건 욕심이 없으면서, 워라벨을 중시하는 나에게는 두 번째 회사 같은 직장이 어울린다고 느꼈다. 만약, 남들이 좋다고 하는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단점을 의도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남들이 좋다고 평가하는 회사라며,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입사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입사했다면, 들어가서 후회했을 것이다.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몇 년 다니다, 회사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 그냥 다녔으면 경제적으로는 윤택해도, 정신적으로는 가난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니까.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불행하기는 충분하다.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살며 젊음을 허비했을지도 모른다.


취업준비생들 같은 경우에는 회사의 장점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고, 기업정보 같은 경우에는 공개가 되어있는 정보가 장점 또는 구체적이지 못한 단점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정적인 성격은 숨겨진 지혜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물론, 첫 번째 회사에서 예상외로 잘 적응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중요한 건, 마음이 가는 스타일의 직장에 입사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원했던, 나의 가치관에 맞아떨어지는 직장에서 조직생활을 해야 그나마 불행을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직업선택을 할 때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장점이든 단점이든 다양한 진실을 마주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성격에는 장단점이 다 존재한다. 부정적이기 때문에 단점도 볼 줄 안다. 그래서 사회 통념과는 다른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나에게 가장 적합한 의사결정을 냉철하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소중한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릴 수도 있다. 거저 주는 행복을 걷어차게 될 수도 있다. 눈 앞에 있는 좋은 것을 못 알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성격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도 아닌 것 같다. 최악은 피해 갈 수 있지만, 최선을 얻지는 못한다. 불행을 피해 갈 수 있어도, 행복에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인생에는 균형이 필요한 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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