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 생신 밥상, 왜 며느리가 차려야 해?

참 안 맞는 부부

by 오렌지양



생일밥상.PNG

* 이 에피소드는 '착한 며느리병'이 중증에 달했을 때의 일입니다.

'착한 며느리병'을 극복한 지금은 사이다 1.5L 원샷하는 에피소드들이 많지만

이 에피소드는 물고구마 정도의 답답함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시댁 생신 밥상, 왜 며느리가 차려야 해?



결혼 후 며느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날들이 있다.

시댁 어르신 생신, 명절, 제사 등등등!

'시'가 들어가는 모든 행사들이다.


하지만 우리 시댁은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막장 시댁과는 거리가 멀어서

각종 행사 때도 크게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시댁은 가족들끼리 서로 연락을 잘 안 한다. 전화도 한~두 달에 한 번?

그리고 남편이 워낙 일 때문에 바빠서 명절날에는 2~3년에 한 번? 갈까 말까

(버린 자식이 아니다. 바쁜 자식이다)

남편이 살가운 아들이 아니었기에 나는 당연히(?) 그 여파가 나에게도 미칠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예고 없이 걸려오는 어머님의 돌발 전화(돌발 퀘스트 포함)를 제외하고는

전화 자주 해라, 주말마다 찾아와라, 용돈을 보내라와 같은

3대 시어머니 스킬을 발동하지 않으셔서 좋기도 했지만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으신가?'라는 생각도 했다.


생각해보면 원래 자식들과 연락을 자주 하는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우리 시어머님, 시아버님은 자신의 인생을 100% 즐기며 살고 계셔서

딱히 나한테 줄 관심이 넉넉지 않은 것이다(!)


장점과 단점이 극명한 시댁이지만

이제 막 결혼 초장기, 모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시절이라 그런지

나에게는 시댁의 장점만 돋보였다.




그리고 결혼 한 달 후.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모든 초보 며느리들이 두려워하는 순간.

바로 시어머님 생신!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오빠, 어머님 생신 때 매년 뭐했어?"


"안 바쁘면 다 같이 밥 먹는데... 한 4~5년 동안은 거의 안 먹었던 것 같은데?"

우리 집 식구들은 다 모이기가 진짜 힘들어서 생일날 딱히 뭘 안 해~ 걱정 마"


그래서 안심했다.

그때만 해도 시대의 장점만 돋보이던 시절이니까

당연히 별일 없겠거니, 같이 외식을 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안심은 소, 돼지의 갈비 안쪽에 붙은 연하고 부드러운 살을 뜻하는 말이었다




시어머님 생신을 일주일 앞두고

어머님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오렌지야~ 며칠 있으면 내 생일인데..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네~ 어머님! 갖고 싶은 거 있으세요?"


"그게 아니라...

내 친구들이 원래 결혼하면 며느리가 생일밥 차려주는 거래~

우리 오렌지가 내 생일밥 차려주면 안 될까?"


"(회로 정지).... 네?"


"그냥 미역국이랑 밥만 하면 돼~ 너네 신혼집 구경도 할 겸 거기서 먹으면 어떨까?"


"오... 오빠랑 상의를...."


"나는 우리 며느리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 한 번 얘기해봐 ^^"


예상치 못한 카운터 펀치(?)에 나는 잠시 굳었다.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이 상황을 전했다.

남편 역시 적잖이 놀랐다.


"우리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어! 방금 그러셨어... 어떡해? 오빠, 나 어떡해?! ㅜㅜ"


"에휴... 내가 엄마랑 통화해볼게"


식구들이 다 모이기가 힘들어서 생일은 그냥 지나간다며!!

걱정하지 말라며!!! 분명 남편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아들의 '엄마'였을 때 얘기고

지금은 며느리의 '시어머니'가 되었으니 얘기가 달라진 것이다.


남편은 '우리 엄마는 남들 시어머니처럼 절대 안 그럴 거야~' 하더니

우리 엄마가 이런다고? 하며 말 그대로의 시. 어. 머. 니. 같은 모습에 꽤나 놀란 듯했다.

어머님과 통화를 마친 남편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오렌지야...

그냥 생일상 차리자"


"뭐라고?!?!?!?!?! 진짜 차리라고?!?!?!?!?!"


"내가 다 도와줄 테니까 그냥 엄마 부탁 한 번만 들어주자"


우리 남편은 다른 남편들과 다를 거라 굳건히 믿었건만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남편들과 똑같을 줄이야!

다행히 남편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음식은 그냥 다 사고 미역국만 끓이자. 국도 내가 끓일게. 넌 그냥 접시에 담기만 해"


우리 부모님 생신 밥상을 차려 준 적도 손에 꼽는데

갑자기 시어머님 생신 밥상을 차려야 한다니 ㅜㅜ

뭔가 억울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때는 '착한 며느리병'이 중증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예부터 '어른을 공경하자'가 나의 신조인지라

시댁도 어른이기에 어른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 오렌지, 주방칼을 뽑아 들었다.



대망의 생신날

다행히 남편은 약속을 지켰다.

(안 지켰으면 바 선생이랑 같이 내쫓으려고 했다)


음식은 대부분 포장된 걸 사서 접시에 담기만 했고

반찬 몇 가지는 내가, 미역국은 남편이 끓였다.

그렇게 평화롭게 생일파티를 했습니다~라고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또 있었다.

10평 남짓한 이 조그만 집에 어머님은 대체 무엇을 자랑하고 싶으셨던 건지,

시댁 식구들을 전부 부른 것이다.

평소 4명 정도만 앉으면 꽉 차는 거실에

무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둘러앉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숟가락 하나를 들 때도 옆 사람과 부딪혀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 놀랄 힘도 없었다.


더 놀랄 힘도 없는 건 뭔지 아는가?

나는 시아버님 생신도 똑같이 생신 밥상을 차려야 했다.

이 정도면 '착한 며느리병' 중증 맞죠?


더더더 놀라운 일은 바로 뭐다?

여러분이 예상하는 바로 그것 맞다.

친정은 멀다는 이유로 우리 부모님 생신은 생신 밥상은커녕 같이 제대로 밥을 먹지도 못했다.

나는 너무 서러워서 엄마한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는데

우리 엄마는

'며느리는 다 그런 거야'

라며 같은 며느리로서 날 위로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기에 남편에게 나는 계속 이 부당함을 어필했고

결국 결혼 2년 뒤, 남편은 휴가를 내고 친정으로 내려가

우리 부모님의 생일을 함께했다.


우리 엄마는 '며느리는 다 그런 거야'라고 했지만

다 그런 며느리는 없다.

처음부터 며느리인 사람도 없다.

며느리도 우리 아빠, 엄마를 먼저 챙기고 싶다.

그러니 부디 며느리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시기를,

부디 며느리들을 누군가의 딸로 '존중'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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