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정원으로의 초대, 작가 신수진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길을 나섰는데 발 끝에 와서 부딪히는 잎새들을 만날 때가 있다. 때로는 커다란, 대개의 경우 조그만 크기의 나뭇잎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듯 바람에 몸을 실어 날아오르려 한다. 그 작은 나뭇잎들 중 하나에 우리의 시선이 닿아 그들을 자세히 바라보게 될 때,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그들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수진의 작품 앞에 설 때 우리는 이것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의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그 색채의 무게가 가져다주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점점 가까이 그림 앞으로 가면 갈수록 새롭게 발견하는 작은 것들에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그림을 보는 대부분의 관객에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경험과 반응이 된다.
작가는 판화와 회화를 접목시키는 복잡하고 독특한 작업을 한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판화를 전공했다. 판화를 좀 더 깊이 공부하려고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회화와 판화를 넘나드는 보다 풍성한 화면을 만들어냈으며, 여러 매체에 대한 그의 연구는 작품의 공간을 확장시켜 설치작업으로 까지 이어졌다.
그의 에칭 작품 <Dancing Leaflet (춤추는 작은 잎)>에 그려진 한 개의 여린 나뭇잎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작은 자연의 단위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전체 화면 아래쪽에 커다랗게 확대되어 그려진 편안한 파스텔톤 연두색의 작은 나뭇잎은 그림의 중심 오브제가 되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여태껏 광활한 대자연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그리려 애쓴 화가들은 많았지만, 이렇듯 작은 소단위의 대상에 관심을 두고 그려낸 화가들은 많지 않았다. 찬찬하고 침착한, 또한 꼼꼼하고 단아한 작가의 성향이 그의 작품들에서 그대로 읽힌다. 그는 어찌 보면 지나치게 치밀하다 싶을 정도의 작업을 하고 있고, 그 결과 배가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을 완성해낸다. 그의 작품 속 작은 자연을 알아보고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남들이 모르는 자연의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만족감을 지니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 나의 작업은 일상적인 주변의 자연환경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주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라고 적고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라도 하나하나 각각 다른 형태와 개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그는 그 작은 존재들의 변화와 성장의 이미지들을 포착해서 그려내고자 한다. 인그레이빙 기법을 통해 작은 단위의 이미지들을 반복, 중첩, 시킴으로써 그 단위들은 생명력을 얻고, 스스로 화면 안에서 성장해가도록 유도한다.
위의 작품 <Orange Blossom> 에는 선명한 오렌지 색 나뭇잎들이 겹쳐지고, 반복됨으로써 비 정형화된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다. 멀리서 전체 화면을 볼 때는 커다란 오렌지 색 꽃이 활짝 피어있고 오렌지 나뭇잎들이 뭉쳐있는 부분이 꽃의 중심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면 전체에 나뭇잎들이 골고루 퍼져있어 비구상적 올 오버(all-over) 페인팅의 특성이 나타난다.
신수진의 작업 방식과 그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볼 때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이 연상되기도 한다. 판에 물감을 바르고 찍어낸 후, 바탕의 색을 지우고 먼저 찍어낸 종이에 다시 찍는 과정을 반복해서 얻어지는 그의 그림은 여느 판화들과 달리 복제가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작품이다. 판화로 완성된 이미지 위에 다시 유화나 아크릴로 색깔을 덧입히기도 한다. '판화 위에 그려지는 회화'라는 이름으로 그의 작품을 정의 내리는 것도 신수진의 작품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나뭇잎과 씨앗들을 수없이 캔버스 위에 수놓듯 찍어내고 그려내는 그의 작업방식은 ‘잎 점묘법'이라 불리워도 이상하지 않다. 그 이름이 작가나 관객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집중과 세심함을 요구하는 그의 작업 방식이 점묘법 화가들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섬세한 화가의 손길 안에서 작은 단위의 자연물들은 반복되고, 중첩되어 색채로 쌓여가면서 새로운 에너지와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정원 안으로 우리를 직접 초대하기도 한다. 화가의 정원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단순히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직접 나무와 꽃을 가꾸고 성장시키는 에너지의 전달자가 된다. 2014년 '어린 왕자 인사이드' 전에 설치된 인터랙티브 작품 <Forests sharing> 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직접 붉은 색종이로 각자의 단 하나뿐인 꽃을 만들어 숲길에서 꽃을 피우고 싶은 자리를 골라서 달아보도록 하는 작품이었다. 관람객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컨템퍼러리 설치미술의 특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이 작품은 관람자 참여와 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예술의 공간과 개념이 확장되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신수진의 작품 안에서 자연의 작은 단위들이 성장하고 생명력을 얻는 것처럼, 그의 작업 방식과 그림들은 수많은 고민과 시도, 새로운 매체에 대한 연구와 탐색을 통해 변화되고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가 그만의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를 조정하고, 가보지 않았던 길의 새로운 자연을 발견하게 될 때마다 그의 작업은 조금씩, 때로는 꽤 많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의 자연과 그 안의 작은 대상물들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와 마음가짐은 크게 변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작은 자연들이 모였을 때 생기는 커다란 힘과 놀라운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알려준 작가는, 오늘도 그의 작업실에서 작은 개체들을 하나하나 찍어내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그들이 모여 만들어낼 에너지가 그의 작품 속에서 확장되어 보는 이들에게 가 닿기를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