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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연 (조예설)

우리만의 이야기를 캐릭터로 바꾸는 힘, 일러스트레이터 숙연

by 미술사가 나리

세상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림 그리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하는 그 사람을 상상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만난 숙연 작가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무척 잘 그렸고, 화가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꿈을 꾸어본 적 없는 천상 화가, 그림쟁이였던 사람.


어린 시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본 어느 홍대 미대 교수가 그의 어머니께 "이 아이는 정말 그림에 소질이 있어요. 계속 그림 공부를 시키시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그가 얼마나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음성 플랫폼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들 헤어진 전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얘기를 하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분위기가 너무 숙연해져서 자신의 닉네임 란에 '숙연'이라고 적었다가 그 이름이 너무 맘에 들었고, 그 이후로 숙연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특유의 재치와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는 배낭을 메고 세계 여러 나라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그 나라, 그 지역 예술의 다양성에 매료되었으며, 각 지역 예술가, 화가들이 보여주는 그 지역만의 독특함을 가진 예술작품들을 보면서 부러움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그의 삶의 현장, 부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6개월간의 배낭여행 후에, 5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에는 왜 우리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현대 예술 작품들이 드문 것인지, 또 오랜 전통 하에 발전해 온 고향 부산의 아름다움과 특성을 반영하는 미술과 예술가들은 왜 찾아보기 힘든 것인지, 안타까움과 아쉬운 마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먼저 우리나라와 부산의 독특한 아름다움과 정체성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작가가 되어, 그림 속에 그려낼 캐릭터 안에 한국적 미와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내기로 결정하였다. 자신이 살고 있는 로컬 문화와 자신의 예술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그때부터 숙연 작가 작품의 주된 주제와 소재 안에서 끊임없이 행해진다.


이 글 표지에 실린 그림 <왕빵, King-Pang>은 2021년도 디지털 페인팅 작품으로, 조선 힙 빵 시리즈 중 하나이다. 힙 빵은 세상에서 가장 힙(hip)한 식빵을 캐릭터화 한 것인데, 이 그림에서 힙 빵은 조선시대 왕이 썼던 익선관을 쓴 채로 조선 팔도를 여행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힙 빵 뒤에 그려진 일월오봉도는 실제로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왕이 앉았던 어좌 뒤편에 놓였던 병풍에 그려진 그림이다. 여기 그려진 일월오봉도에는 수줍은 듯 웃고 있는 해와 달이 좌우에 위치해있고, 그 아래쪽에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여기서 해와 달은 음양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는 오행을 나타내며, 이 그림의 배경은 결국 하늘과 땅, 물,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우주를 의미한다. 이 그림은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숨겨진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그림 중심에 등장하는 왕빵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가 된다. 위대한 왕빵의 왕조가 영구히 지속되길 바라는 염원이 이 그림 속에 오롯이 담겨있다. 특히, 이 그림에 그려진 일월오봉도는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그림으로서 한국 고유의 문화와 사상을 잘 표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라이>, 2021, 캔버스에 아크릴

경쾌한 오렌지색과 노란색이 선명하게 눈에 띄는 작품 <그라이>는 역시 힙 빵 시리즈에서 파생되어 나온 그림이다. 힙(hip)한 식빵인 힙 빵이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달걀 하나가 떨어지더니 힙 빵의 머리 위에 안착하였다. 그 달걀이 따끈한 힙 빵의 머리 위에서 구워지면서, 반숙의 그라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 그림의 바탕이 되었다. 뾰로통한 입술 모양을 하고 세상에 불만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라이지만, 짙은 일자 눈썹 아래에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는 동그랗고 까만 두 눈을 가지고 있다.


숙연 작가의 작품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고, 사용하고, 때로는 먹을 수도 있는 대상들이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그들 각각은 고유한 스토리와 성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작가 특유의 유머감각과 스토리 창작 능력이 이들 캐릭터 속에 잘 녹아들어 스며 나오고 있다.


<금잉어>, 2021, 캔버스에 아크릴


<금잉어>라는 작품은 이 글 처음에 언급했던 <왕빵>에 그려진 일월오봉도 안에, 오른쪽에 그려진 금잉어를 따로 떼어내서 클로즈업시킨 듯한 그림이다. <왕빵>에서는 금잉어가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그려져 있어서, 우리의 시선이 이 금잉어에게 집중되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딱 한 마리 금잉어를 캔버스 전체에 가득 차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금잉어를 좀 더 자세히 보게 된다. 금잉어의 표정과 몸짓, 유선형의 유려한 몸체까지 세밀하게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금빛 잉어의 선홍색 지느러미는 그 선명한 색채와 유동적인 리듬감으로 인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역동성을 느끼게 해 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전통 민화에는 잉어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잉어 그림은 관직 등용, 자녀들의 시험 합격, 세상에 나가 성공하여 큰 뜻을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숙연 작가 역시 자신의 금잉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행운과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그림을 밝고 생생한 색채로, 그가 만든 캐릭터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실제로, 숙연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원한다고 했다. 그의 그림을 통해 관객들이 다양한 상상의 세계로 나아가길, 풍부한 영감을 얻기를 소망하고 있다.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지금이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다른 영역의 일에도 도전하여 성장해나가고 싶어 한다. 지금의 그의 모습을 보면 그런 그의 소망이 허튼 소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멋지게 성장해서 그가 사랑하는 로컬 문화계와 우리나라 예술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아티스트로 성장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잠시라도 행복해지기 바라는 작가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나를 포함해서, 숙연 작가의 그림 앞에서 행복하게 미소 짓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우리 입가의 미소가 그 성취의 증거일 것이다. 이제는 숙연 작가가 자신과 자신의 그림이 가져야 할 새로운 더 큰 소원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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