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람

살랑이는 잎바람에 실려 온 요정과 대면하는 법, 일러스트레이터 이파람

by 미술사가 나리

어느덧 완연한 봄 향기가 난다. 콧등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미 농익은 듯 보여, 여름을 재촉하고 있는 요즘이다.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봄날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이파람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그는 만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듯한 인물들을 그리는 작가였는데, 왠지 이파람 작가가 그들 만화 속 주인공들과 닮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파람이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가 왜 그런 만화 같은 이미지들을 그리는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좀 더 친해지기까지 질문들은 뒤로 미뤄두었다. 그와 나누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가 갖고 있는 풍부한 미술사 지식과 그림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고, 오랜 시간 그림과 미술, 작업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많은 부분 동질감을 느꼈고, 어느새 그에 대한 호감이 깊어지고 있었다.


올해 들어 그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게 될 기회가 생겼고, 이때다 싶어 나는 그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는데, 그는 귀찮아하지 않고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왜 이파람이란 이름을 지었어요?"라는 질문에, 그는 “어느 날 산책을 하던 중에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과 소리에 매료되어, 저렇게 시원한 잎바람 소리를 내며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을 담아 이파람이란 이름을 지었다.”라고 했다. 매우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와 무척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느껴졌다.


이파람 작가는 사실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엄청나게 잘생기거나,예쁜 미남미녀나 연예인 같은 사람들에게서 보다 웹툰이나 오래된 순정만화 주인공에게서 더 설레는 마음과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또한, 그가 좋아하는 옛 거장 화가들의 그림들 뿐 아니라, 현대의 독창적인 일러스트나 만들어진 캐릭터들을 볼 때에도 큰 자극과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팝아트 화가들이 차용했던 만화 이미지들이 그 제작방법과 표현된 방식 등 주로 외형적인 측면에서 만화의 영향을 보이는 반면, 이파람의 그림에 등장하는 만화 이미지들은 좀 더 사람다움이 느껴지는, 인간의 감정과 성정을 품고 있는 존재들로 보인다. 물론 그들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신체비율과 비인간적인 완벽한 미모를 지니고 있지만, 왠지 그들의 내면은 우리 주변의 친구나 선후배, 이웃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느껴진다.


이 글 표지에 실린 그림 <님프 드리아데스, Nymph Dryades>는 숲의 요정 드리아데스를 그린 것이다. 숲의 청량한 바람에 풍성하게 일렁이는 청록색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에메랄드 빛 커다란 눈동자를 지닌 요정 드리아데스는 나무에 살면서 나무와 운명을 함께하는 요정이다. 숲 속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내며 숲에 놀러 온 우리들을 바라보는 드리아데스의 눈이 우리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그녀의 매혹적이고 몽환적인 마법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님프 멜리아스, Nymph Melias>, 2021, 디지털 페인팅


그의 작품 <님프 멜리아스>는 모든 나무, 특히 물푸레나무의 요정이라 불리는 님프를 묘사하고 있다. 멜리아스는 그리스 신화의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거세당할 때 떨어진 핏방울과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결합하면서 생겼다고 알려진 인류 최초의 여성, 인류의 어머니로 알려진 님프이다. 이 그림은 멜리아스의 아버지 격인 우라노스의 핏방울을 의미하는 붉은색을 주조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지니고 있는 만물의 근원, 생명과 풍요로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요정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물푸레나무는 뿌리와 줄기, 나무껍질까지 모든 부분이 약재로 쓰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물푸레나무의 요정인 멜리아스 역시, 모든 나무와 모든 사람들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며 우리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길 원하고 있다.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을 보는 우리는 그녀가 우리에게 건네는 풍요의 메시지를 전해받고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님프 헤르세, Nymph Herse>,2021, 디지털 페인팅

이파람 작가가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베이스에는 보랏빛 컬러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운 보라색의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지닌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제우스와 셀레네의 딸인 님프 헤르세는 숲의 이슬을 주관하는 요정이다. 헤르세는 보름달의 아름다움을 내면에 품고, 이른 새벽 숲 속의 나무와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싱그럽고 영롱한 이슬방울을 온 세상에 뿌려준다. 헤르세는 이슬의 요정이기 때문에, 새벽녘 이슬이 내리는 시간 동안에만 우리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꽃을 가꾸는 인간 소년을 사랑했던 헤르세는, 밤새 부지런히 이슬방울을 뿌려주고 싱그러운 꽃을 피게 하다가 꽃을 가꾸는 소년이 오는 아침이면 햇살 속으로 숨으며 사라진다. 이 그림에서 헤르세는 보랏빛 청초한 눈망울로 사랑하는 인간 소년을 몰래 응시하고 있다.


이 세 명의 요정을 처음 한꺼번에 보게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유명한 르네상스 명화들 속 목동 파리스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세 명의 여신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뽑아서 사과를 건네주는 역할을 맡은 목동 파리스의 심판에서처럼 나도 모르게 어느새 어느 요정이 젤 예쁜가 가늠해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님프 드리아데스, 멜리아스, 헤르세, 이 세 명의 요정들은 각각 자기만의 매력을 지닌 채 고유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며, 처음에는 화려한 겉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점차 신비롭고 몽환적인 그들의 내면세계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파람은 좋아하는 작가로 언스킬드 워커를 꼽았다. 노후화되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던 구찌 브랜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던 일러스트레이터 언스킬드 워커는 그가 지향하고 있는 지점에 서있는 작가이다. 그는 언스킬드 워커의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일러스트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휘어잡을 수 있는 독특한 그만의 캐릭터를 그리고 싶어 한다. 이파람이 앞으로 그려낼 인물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첫마디는 무어라 건네야 할지 기대되고 괜스레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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