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민선희)

대상의 의인화로 완성되는 감성 초현실주의, 일러스트레이터 민선희

by 미술사가 나리

그녀의 오른쪽 눈은 푸른 꽃무늬 장식이 있는 흰색 주전자이다. 주전자에서는 그녀의 눈물일 수 도 있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고, 그녀의 왼쪽 눈동자는 탐스럽게 익은 빨간 사과가 대신하고 있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오른쪽 옆모습 얼굴은 긴 머리의 남자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혹은 그의 이마 부분에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창문이 있고, 창문 너머로 세 개의 초록 잎사귀를 지탱하고 있는 여린 나뭇가지가 보인다. 사람의 붉은 머리카락은 커튼처럼 늘어뜨려져 있어 집처럼 보이는 공간을 감싸주고 있다. 이 글 표지에 실린 그림을 보다가 그림의 제목을 찾아보니, <Life>라고 쓰여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에 의지하며 사는 인생을 그리려 한 것일까.


<너와 나> 2019, 브리스톨 페이퍼 위에 아크릴, 검은 잉크펜

써니 작가의 그림에는 얼굴이 반으로 나뉘어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얼굴에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기도 하고, 한 사람의 옆모습과 앞모습이 동시에 그려져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에 나온 아수라 백작이 떠오르기도 하고, 피카소 그림에 그려진 다시점의 가면과 같은 얼굴이 생각나기도 한다. 정면성의 원리를 지키며 그려진 고대 이집트 문명의 그림 속 인물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속성만을 가지고 있을 수 없으니 어찌 보면 모든 사람의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난다면 모든 사람이 작가의 그림 속 사람들과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보통 얼굴을 먼저 보게 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얼굴에 있는 눈, 코, 귀, 입 등의 기관을 통해 외부의 현상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반응을 한다. 작가는 이런 사실에 집중하고 그의 얼굴 그리기 작업을 시작했다. 삶에서, 일상에서 느낀 감정과 이야기들을 그의 얼굴 그림 속의 오브제와 인체 기관들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 오브제들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양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작가가 오브제들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밝고 경쾌한 원색의 색채들은 이들 대상들에게 더 생생한 느낌을 배가시켜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우리 옆에서 살아있는 듯이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이내 다시 우리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Oh my darling>, 2021, 브리스톨 페이퍼 위에 아크릴, 색연필, 마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대상들 -식물과 동물, 물건들까지- 은 작가의 그림 안에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그들은 마치 친구처럼, 이웃처럼 우리에게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들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 시시콜콜한 우리의 일상에 끼어드는 개입을 실행한다. 그 개입은 때로는 우리에게 기쁨과 환희를, 때로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딸기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중절모를 쓴 딸기 신사의 이야기에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버리다가, 고급스러운 도자기 티세트 위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며 사랑을 나누는 남녀에게로 관심이 옮겨가기도 한다. 동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작가의 그림 속에서 구석구석 숨겨진 사랑스럽고 귀여운 조각들을 찾아낼 때의 기쁨은 생각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사이즈가 매우 작은데, 작은 그림 안에 꼼꼼히 그려놓은 섬세한 이미지들을 보면 놀랍기까지 하다.


<Dancing with me>, 2019, 브리스톨 페이퍼 위에 아크릴, 색연필, 마커


개구리 왕자와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캔디로 변해있고, 그림 액자 속에 그려진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팔에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새와 하늘 그림이 연상되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개구리로 변해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녀의 손길이 무척이나 애처롭게 느껴진다.


<Frog Prince>,2019, 브리스톨 페이퍼 위에 아크릴, 색연필, 마커

써니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유난히 자연을 사랑하셨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님 밑에서 자란 탓에 주변의 식물, 동물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고, 그림과 음악 등 예술적인 면에서도 많은 재능을 물려받았다. 매일매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물들에서 영감을 받는 일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이었다. 이제 어른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작고 평범한 것, 자신의 주위의 것들에서 소중함과 새로움을 찾아내고 있다.


초현실주의 기법 가운데 '데페이즈망' 이란 기법이 있다. 실제로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어떤 물건이 있는 모습을 의미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은 매우 낯설게 보이는 이미지를 연출해낸다. 써니 작가의 그림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그의 그림 속 사물과 대상들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 초현실적인 위치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신이 처한 엉뚱한 위치에 대한 설명을 차갑고 냉정하게 내뱉고 있지 않고, 무엇인지 모를 내면의 따뜻함을 이야기에 담아 전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에, '감성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그의 작품 위에 달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Merry Winter>, 2021, 브리스톨 페이퍼 위에 아크릴, 색연필, 마커, 글리터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고 있기에 그 소중함을 잊고 사는 평범하고 작은 것들이 많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기에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의 소중함을 일찍 발견한 지혜로운 작가의 그림 속에서 그 ‘작은 것’ 들은 작지만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우리가 아직까지 인지하지 못했다면 그건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그림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약간의 수고스러움을 꺼리지 않을 분들이라면 이 ‘작은 것’ 들이 전하는 소박하고 예쁜 이야기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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