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번째 방울
#앨런은 왜 호랑이를 보고 놀랐을까
영화 <행오버>는 곧 결혼하는 더그의 친구 셋과 아내의 동생 앨런의 시끌벅적한 총각파티로부터 시작된다. LA로 날아간 네 명은 호텔의 옥상에서 결의를 다지며 술을 한 잔 들이켠다. 장면은 숙취가 가득한 다음 날로 넘어가 더그가 행방불명되면서 잊어버린 전날의 기억을 더듬어가고, 더그를 찾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굉장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 우리가 볼 장면은 더그를 잃어버린 날 아침, 앨런은 화장실에서 본 호랑이를 마주치자 깜짝 놀란다. 그 행위는 의식하고 이행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무의식적이며 우리는 이를 당연하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무의식의 발견, 프로이트
무의식이라는 것의 정의를 처음으로 내린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그는 인간 사고의 세 번째 일대 혁명은 그 자신의 발견이라고 일컫는데, 즉 무의식의 발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하는 행동이 대부분 숨겨진 소망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면서 하고는 싶지만 우리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이일들이(성적이거나 폭력적인 욕망) 꿈이나 실수 등과 같은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꿈에 집중하여 불안한 기억을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을 통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뱉어내어 무의식에 있던 것을 의식하게 만들어 히스테리 환자를 치유하기도 하였다. 이는 무의식의 시초일 것이다. 꽤 충격적이지만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인간 안에 내재되어있다고도 생각했다. 그가 칭한 무의식은 조금 파격적이었지만 이는 발전하여 의식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무의식과 의식, 본능적 무의식
본인이 프로이트도 아니고 데카르트 혹은 니체도 아니지만, 나의 생각은 앞서 무의식의 발견자와 조금 다르다. 나에게 있어 무의식은 '의식의 반복적인 행동 또는 사유가 만들어내는 습관'이다. 우선,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살펴봐야 할 것인데, 보통은 둘은 다른 상태의 것 혹은 분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본인이 생각하기로서는 무의식은 의식과의 관계를 달리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인식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요한 헤르바르트의 무의식과 의식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그는 무의식이 의식과 의식 영역 아래에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무의식의 존재는 의식이라고 하는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무의식이 위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의식과 무의식은 유기적이며 연결되어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제 나의 무의식의 정의에 뒷받침해줄 학자가 나온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무의식에 대하여 '내가 알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생각하지 않는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반복적으로 또는 이전에 학습한 모든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인지한 것을 지금 이 순간 떠올리지 않는 것을 무의식이라 칭한 것이다.
#예와 함께
책상에 앉은 이 순간, 글을 적고 있으면서 목이 뻐근하고 눈이 아픈 현상을 인지하고 의식하여 기지개를 켠다는 둥,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한다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지개를 켜는 것과 스트레칭을 하면 개운해진다는 의식의 반복적인 행위와 사유 때문에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무의식적인 행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의식에 의하여 무의식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인데, 의식의 선행 없이는 무의식도 진행될 수 없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사람의 걸음걸이가 있을 것이다. 사람의 걸음걸이는 보편적인 정자세가 있지만, 팔자걸음처럼 각자의 개성이 있다. 보편적인 걸음걸이를 걷는 사람이든, 팔자걸음을 걷는 사람이든 그들의 반복적인 행위와 이 걸음걸이에 대해 편하다 혹은 멋을 낼 수 있다 등의 선행적 의식은 우리가 걸을 때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자세를 고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고치려 하는 경우에도 반복적인 의식과 행위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쉽게 고쳐지지 않고 어느샌가 무의식적으로 본래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앨런은 왜 놀랐을까
먼길을 돌아왔다. 그래서 왜 앨런은 놀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앨런은 의식이 무의식에 영향을 주었고 의식의 반복적 사유가 무의식이 되어 놀라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호랑이를 본다면 동물원의 우리 안 또는 미디어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야수성을 인식한다. 이를 의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외의 장소에서 호랑이를 맞닥뜨렸을 때 무조건적으로 습관처럼 겁을 먹게 된다.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감정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의식의 이행이 있었기에 의식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앨런에게는 우리와 같은 절차가 진행된 것이다.
우리는 간단한 소개를 통해 무의식에 대하여 조금은 알아봤다. 앨런이 무의식적으로 호랑이를 보고 놀란 이 순간을 그저 재밌는 장면, 혹은 의아한 장면만으로 넘길 것이 아니라 심오하게 들여다보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생각을 하기에 본인만의 정의로 무의식을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무의식이 아닌 다른 이론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모두의 시선으로 다시 이 질문을 돌이켜보자. "앨런은 왜 호랑이를 보고 놀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