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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누룽지 Aug 03. 2020

Ep8. 눈 내리는 간이역

여덟 번째 방울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흐유, 산다는 게 대체 뭣이간디.." 불현듯 누군가 나직이 내뱉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꼬리를 붙잡고 저마다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임철우 <사평역> 中

추운 겨울, 눈 내리는 작은 시골 사평역. 사무실에서는 늙은 역장이 간이역 같은 이곳에서 등대처럼 마지막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합실에는 조그만 화로가 하나 놓여있고, 그를 둘러 몸이 불편한 노인이 나무의자에 앉아 아들에게 몸을 기대고 있다. 반대편에는 이북에서 온 중년의 사내. 구석 창가에는 청년이, 긴 나무의자에는 죽은 듯 누워있는 미친 여자가 있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여인 춘삼이, 우쭐한 뚱뚱한 서울 여자, 물건 파는 아낙네 둘. 이들이 대합실을 채워 서로 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기약 없는 열차의 불빛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난로를 벗삼아 몸을 녹이는 이들에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북에서 넘어온 중년의 사내에게는 벽돌담과 같은 것, 그나마 알고 지내던 감방장 늙은 허 씨의 행방불명으로 그의 남은 삶은 쓸쓸한 것이다.


노인의 아들에게 삶이란 농부로 자식 놈의 뒷바라지로 한 평생 일하고 근심하다 늙어 병들어 죽는 모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뚱뚱한 여자에겐 돈이다. 장사를 하면서 인사하는 것은 그저 돈에게 인사하는 것뿐이다. 가난에 찌들었던 그녀는 다시는 그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본인의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한다.


춘심이 에게는 골치 아픈 것일 뿐이다. 민들레집에서 일하며 노랫가락에 맞춰 춤추고 술을 마시는 게 좋다. 다만, 가끔 술에 취해 눈물을 흘리는 날도 있다.


대학생 청년. 유치장에서 나와 퇴학처분을 받은 그에게는 살아있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신념과 그것과는 관계없는 강의실 밖의 질서가 그에게 혼란을 준다. 하지만 어지러운 삶에서 잠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두 아낙네에게는 텅 빈 길바닥만 같다. 길이 얹혀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길 위에 찾아가야 하는 것은 그녀들의 몫이다.


미친 여자에겐 홀로 지내는 따뜻한 난로. 그 이상의 삶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무기력한 삶에서도 움직임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과 달리 그 조차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눈 내리는 간이역의 대합실이 아닌 큰 도시의 대합실. 내리는 비를 보며 시야를 유리 밖으로 내던지는 사람. 하릴없이 핸드폰의 스크롤을 내리는 사람. 짐을 바리 싸들고 빠진 물건은 없는지 점검하는 사람. 갈 곳 없어 의자에 잠든 사람. 마음속에 사연을 한 가득 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며 그저 본인이 일어설 때를 기다린다.


비가 내리는 대합실. 저 멀리 들어오는 선로의 불빛을 바라본다. 우리에게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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