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혼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한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가 혼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혼이 난다'는 것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고, 나의 부족함이 오롯이 드러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다. 가시에 찔린 듯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죄책감에 빠져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기도 한다. (물론,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감정을 섞어 혼을 내는 경우는 제외한다)
'혼이 나다'는 말의 뜻은 '정신이 아득해지다',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두려운 경험을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사람의 정신(=영혼)이 밖으로 나올 만큼 아픈 경험'이라는 뜻이다.
요즘은 이 혼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예전보다 더 커진 듯하다. 필자도 마찬가지지만 젊은 세대일수록 혼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문화가 변해서 그럴 수도 있고, 어릴 적부터 혼이 나는 경험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형제가 없거나 많아도 2명 정도라 비교적 부족함 없이 귀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혼나는 것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경험한다고 숙달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혼이 나는 것의 순기능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생각하고, 한 번 더 자신의 내면과 감정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혼이 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두려운 경험을 하고 나면, 고착화돼 있던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을 살피게 된다. 그리고 때론 그 과정을 통해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즉, 자신의 세계를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 짝 나아가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릴 적 이모에게 한 번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어느 날 감정이 격해져 아버지께 무시하는 말투로 반항을 했는데, 그 순간 옆에 계셨던 이모가 나를 방으로 불러들여 따끔하게 혼을 냈다. 벌써 20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신이 혼미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얼마나 따끔하게 혼이 났는지 눈물을 쏙 뺐다. 그 눈 물과 함께, 죄송함과 부끄러움 등 숱한 감정이 빠져나왔던 게 아닐까 싶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혼이 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혼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건방진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혼을 내는 방법, 혼이 나는 방법은, 분명 지혜롭고 현명한 방법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혼을 내는 사람과 혼이 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혼을 내는 사람은 대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진심'을 가지고 혼을 내야 하고, 혼이 나는 사람도 그 마음을 진심으로 느끼고 받아들여여야 한다.
우리는 또 언제 어디서 혼이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상했더라도 그 순간은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나이가 많다고, 직급이 높다고, 체면 때문에 혼이 나는 일을 피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듯이, 우리의 혼은 순환하지 않으면, 너무도 부패하기 쉽고 또 나약해지기 쉽다.
그러니, 쉽지 않겠지만 혼이 나는 순간을 피하지 말자. 그리고 합당한 꾸중이었다면 혼을 내준 사람에게 감사하자.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하는 말이다.
끝으로 '혼이 나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시가 있어 마지막으로 남겨 본다. 윤동주 시인의 시, 참회록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 시인, 참회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