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다쓰루의 '무지의 즐거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상태도 똑같은 정도로 좋은 일입니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의 목록을 길게 만드는 것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길게 만드는 것 이상을 인간의 지적 성장에 좋은 일일지 모릅니다.
아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저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만들 여유가 있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의 목록도 아아 때부터 길게 만들어 두라고요, 그것이 나중까지 오래오래 즐거운 법입니다.
-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中
이해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러니 너무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사랑하고 좋아하다 보면, 언젠가 이해하게 될 테니.
일전에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다, 이 말을 듣고도 한동안 생각에 깊이 잠겨있었다. 지식과 이해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이 시대에,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니. 납득이 어려웠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은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남겨두면, 그 대상을 조금은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된다는 것.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인 후 조금씩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면 된다.
우치다 다쓰루의 선생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계속 쌓아둔다면 그 삶은 더욱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어쩌다 때론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
저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큰 목소리로 확실하게 말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쩌면 자기가 이전에 입에 한 번 담았던 말에 주저앉는 것이나 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성숙해진다는 것은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이루는 일입니다. 쇄신, 즉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워지려면 이전까지 한 번도 떠오른 적 없는 감정을 품는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겠지요. 그런데 그런 새로운 사념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어휘꾸러미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를 손수 찾으면서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中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참 멋져 보인다. 하지만 늘 그게 정답은 아니다, 100% 확실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우리가 그런 확신에 찬 말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런 말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대신 누군가 확신을 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광고와 마케팅에서 사용하는 '확신'을 강조하는 말들은 하나의 카피에 불과하다. 성숙을 위한 소통의 언어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다쓰루 선생이 말한 '자기 쇄신'의 차원에서는 더욱 그렇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있다고 해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래서 늘 조심스러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확신에 찬 말들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다. 확신에 차서 한 나의 말이 공허한 외침이나 섣부른 판단이 되어 버리진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사별삼일, 즉갱괄목상대'라는 오래된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모름기지 사흘을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성숙관'입니다. 사흘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될 정도로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이루는 것이 목표라는 겁니다. '진정한 자기' 같은 것에 주저앉고 매달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중략)
'진정한 나'를 찾아서 평생 그것을 '연기'하는 것은 저에게 좀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진정한 나' 같은 것에 아무런 흥미가 없거든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똑같은 인간이라면 외려 살아갈 보람이 없지 않을까요?
-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中
꽤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진정한 나' 같은 건 관심도 없고 있으나 없으나 그만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이유로, 나를 어떤 특정한 틀이나 모델에 가둬놓고 살아가는 지도. 진정한 나? 그게 도대체 뭘까?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나는 같았다. 진정한 나는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다. 그저 살아가면서, 때로 무언가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평생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다쓰루 선생의 말대로라면, 그게 없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왠지 모르게 단순함의 키워드이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열심히 사세요?"라는 아들의 뜬금없는 질문에 "뭐, 이유가 있나? 그냥 사는 거지. 즐겁게 살면 되는 거지." 라고 답하셨다.
생각이 많은 나는, 때론 이런 아버지의 단순함이 참 좋다. 뭐라고 할까. 안정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무도가는 승패를 다투고 강약을 겨루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우열을 다리는 경지를 떠나 자신이 보유한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최고로 키우고, '있어야 할 때 있고,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는' 인간이 되는 것이 곧 수행의 목적이라고 다다 선생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도장에서 합기도를 훈련하는 까닭은 누가 강한지, 누가 기술이 뛰어난지 겨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재능력을 최고로 키우는 방법을 체득하기 위해서입니다.
"도장은 무대 뒤 대기실이야. 도장에서 한 걸음 밖으로 나간 곳이 곧 정식 무대인 거야." 다다 선생을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中
조금 더 밝고 즐겁게 살기 위해, 이번 생은 연습이라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이니까 대충 해야지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연습하되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는 말아야지. 언젠가 이 연습의 끝에 진짜 나의 무대가 올지도 모르니까,라는 마음으로.
모든 무대는 장막이 올라가고 그 뒤에 남은 정적 속에 진짜 의미를 담고 있을테니. 너무 지금의 삶을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사랑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