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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를 맡고 싶다면 "그때를 기록하라"

태백의 오대산을 넘어, 강릉의 바다로

by 글로

떠나고 떠나도 또 떠나고 싶다. 긴 추석 연휴를 맞아 방랑벽이 도졌었다. 틈만 나면 떠나고 싶은 나이기에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순 없었다. 이런 시기면 내 안에 흐르는 피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어머니는 "집안 내력상 얽매이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한다"고 하셨지만, 그것이 진짜인지는 스스로를 검증하고 실험하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그런 사람(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한 성향에 가두고 싶진 않다.


다만 분명히 확인한 사실이 있다. 푸른 숲과 청록의 바다, 흙냄새가 짙은 자연에서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꽤나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걸 보고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싶은 욕구 또한 마찬가지.


그래서 긴 휴식의 시간이 주어지면 늘 나에게 묻는다. "너는 왜 그렇게 살고 싶니?" 하지만 명확한 이유를 찾는 건 쉽지 않다. 도시의 삶이 각박하게 느껴져 떠나고 싶은 건지, 자연이 주는 어떤 매력에 이끌려 그런 건지, 단지 여행이 주는 새로운 에너지가 좋아서 그런 건지. 갑자기 영화 '어바웃타임'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영화 '어바웃타임' 中에서


"우리는 모두 일상 속에서 시간 여행을 하고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훌륭한 여행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야." (영화 '어바웃타임' 中에서)


일상을 여행처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일상을 여행처럼 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루하루를 여행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것이다. 평일 아침을 시작할 때 스스로에게 "난 지금부터 여행을 가는 거야"라고 말하면 되지 않는가?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AI) 비서를 시켜 알람으로 그런 말을 하도록 설정해 놓는 방법도 있다.


물론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통체증과 직장 상사의 꾸중, 업무 스트레스에 모든 것이 리셋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미친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여행이라고 여기면 어떨까?


하루의 끝에 말해보자. 오늘 하루도 이 낯설고도 지루하고, 때론 살 떨리는(회사에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여행을 잘 이겨냈음에 감사하며. 그리고 다시 올 주말과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며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다.


일상에서 여행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자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기록하는 것'이다. 긴 여행 아니라도 내가 이렇게 여행기를 남겨두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고소한 커피 향을 맡으면 그 커피가 다시 생각나듯, 여행의 기억도 기록해 두고 펼쳐보면 그때의 향기와 다시 맡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지금보다 더 멋진 여행을 떠나고 싶은 동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강원도 태백에 위치한 '오대산국립공원' 등산 中


우리나라에 국립공원이 이렇게나 많은 지 몰랐다. 이번에야 검색해 보고 알았는데 국내에는 총 23개의 국립공원이 조성돼 있다. 산과 바다가 많은 나라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1년에 1곳만 제대로 탐방해도 23년이 걸린다.


이번에는 강원도 태백에 위치한 오대산국립공원을 방문했다. 오대산의 비로봉 정상은 약 1650m로, 1100m까지는 차량으로 오를 수 있다. 예비 신부와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정상 등반에 도전했다. 하지만 정상 200m를 남겨두고 급작스런 우천으로 인해 하산하고 말았다. 그래도 태백의 높고 푸른 산새를 마주하니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특히 산속에서 마주한 산다람쥐들이 정말 귀여웠다. "너희들은 깊은 산속에 사는구나. 얼마나 행복하니?"라고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앞으로 국내 여행을 가게 된다면 깊은 숲이 있는 국립공원에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등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렌트한 차량의 왼쪽 앞 타이어압이 적어 위험하다는 알림이 울렸다. 렌트를 수없이 해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렌터카 업체인 '투루카' 고객센터에 연락하니, 계속 운행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근처에 세운 후 장소를 알려주면 정비센터를 호출해 주겠다고 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근처에 있는 상원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20분여 지났을까. 정비센터에서 한 분이 오셔서 펑크를 때워주고 가셨다. 놀란 우리와 달리, 그분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타이어에 거품을 낸 후 빠르게 피스를 찾아냈다. 알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가 싶었다.


여행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지까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다니, 정말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예상치 못하게 해결되어 감사했다.





등산을 마치고 강릉으로 향했다. 저녁즈음 방문한 강릉중앙시장은 그야말로 성황이었다. 명절 연휴 전이라 그런지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좁은 시장 골목에 사람들이 발디딤틈 하나 없을 정도로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베니닭강정, 오징어짬뽕순대, 순두부 젤라토 아이스크림까지 온갖 먹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밟힌 것은, 이 많은 인파 속에서도 사람이 없는 점포가 꽤나 많았다는 것이다. 한산한 점포의 주인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가 먹고 싶어 하는 간식을 몇 가지 사서 근처 화단 둔치에 앉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여전히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여행의 시간. 우리가 함께한 또 하나의 밤이 흐르고 있었다.




강릉 경포호 근처 화단과 안목해변, 오죽헌에서 남긴 사진들


4인용 커플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를 한 바퀴 돌았다. 가을바람에 지난날 품었던 근심이 모두 날려가는 듯했다. 커플자전거 앞에는 아이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 그쪽에 눈이 갔다. 양옆으로 내달리는 일가족들의 모습이 괜스레 부러우면서도 저마다의 어려움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나도 이곳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날이 올까 하고 상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하며 함께할 미래를 그리는 일, 그만큼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그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일상도 잘 지켜내야 한다.


여행을 기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기억을 떠올려 구구절절 꺼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간 부지런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기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언젠가 일상의 무료함에 지쳐 쉼이 필요할 때 들쳐보면, 큰 힘이 된다. 그리고 또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러니 일상이든 여행이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다시금 끄집어내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줄씩 남기다 보면 당신의 삶도 언젠가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할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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