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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Mar 28. 2019

박완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中에서>




공기가 많이 차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수족의 오한, 나는 이분된 인간이다. 몸은 뜨겁지만 손발은 차갑다. 아버지는 뜨거운 몸을 가졌고 어머니는 정반대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합물이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백번 바뀐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시인의 거리, 어느 순수의 담벼락' 전시가 끝났다. 홍보를 위해 열심을 낸 덕인지, 많은 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엔 군대에서 만난 동기도 있었다. 무지 반가운 얼굴이었다. 


그 친구는 약품연구회사에 다닌다. 이공계에서 일을 하지만 문학이나 독서를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쓴 글들을 꾸준히 보며, 전시도 꼭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함께 식사를 하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근 4년만에 보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보통 남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찌질하고 낮은 모습으로 군대에서 만난다. 그래서 그런지 편안했다. 


그에게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소개했다. 관심이 있는지 자신도 한 번 와 보겠다 했고, 책 한 권을 추천해줬다. 읽은 소설 중 가장 감명 깊었던 책,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처음 들었을 땐 외국소설인 줄 알았다. 같은 제목의 음악도 있었다. '라벨'이라는 작곡가의 곡.


또한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미술 작품에 근간을 두고 있다. 작가의 시도로 음악, 미술, 문학이 하나가 된 것이다.  






곡을 들었다. 마치 텅 빈 궁궐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듯, 우아한 풍경이 펼쳐진다. 앞에는 금으로 장식된 대형 원반 식탁이 펼쳐져 있었다. 측면에 한 여인이 앉아있다. 그녀는 누굴까? 공주? 하녀? 흐릿한 시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음악을 듣고 느낀 나의 상상이다.


이 소설은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철저히 현실적이고 철저히 아름다운. 마치 영혼의 언어를 속삭이듯... 숨을 내쉬듯... 심장의 두근거림을 그려...나간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린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고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드 中, 박민규> 


출처 : CNN



극 중 화자는 못생긴 그녀를 사랑한다. 이 소설은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다. 처음엔 책장을 넘기며 예쁘고 잘생긴 두 사람을 상상했다. 세기가 인정하는 미남미녀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얼굴이 지끈거렸다. 잘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은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지, 그동안 나는 몰랐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시소도 이미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좋은것>이 <옳은것>을 이기기 시작한 시대였고, 좋은 것이야만 옳은 것이 되는 시절이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학력에서, 경제력에서... 또 외모에서... 한눈에, 또 첫눈에 대부분의 승부가 판가름 나는 세상이었다.

<p75>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고질적 문제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병이다. 신이 인간에게 눈을 주고 볼 수 있게 한 건,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깨닫게 하려 한 것이다. 화자와 요한과 그녀, 세 사람은 모두 보이는 것을 추종하는 세력에 의해 상처받은 피해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中에서>



상상하는 것,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믿는 것, 이것은 종교나 철학 이상으로 의미가 있다. '사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갈망한다.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 다니는 고린도 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p228> 



다시 라벨을 듣는다. 그녀가 준 LP도, 그녀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또다시 재생되는 그날의 음악처럼 나는 그 벌판과... 눈과... 나무들과... 그녀를 떠올린다. 실은 더없이 초라했을... 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가혹한 세상과... 들러리 선 시녀처럼 서 있던 그녀와 나를 떠올린다. 무엇 하나 정확하지 않은 기억 속에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다. 

지금의 나도, 스무 살의 나도 그녀를 사랑하고, 사랑했었다. 그것이 나의 전부다. 늦었지만 이제 그 전부를 이해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p36>




사랑에 대한 실존적 고민없이 우린 살 수 없다... 사랑의 결론에 닿을 때가지 보이지 않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지금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당신은 왜 존재하는가? 

나의 대답은...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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