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살아남기 - 거꾸리개고사리
누가 4월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하였던가? 나에겐 4월은 산과 들이 부르는 속삭임에 유혹되어 환희의 시간을 보내는 계절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4월 첫날, 천만 뜻밖에도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15분 동안이나 저승사자의 손을 뿌리치느라 다리가 부러지고 손가락 휘어졌어도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지옥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가? 내가 이렇게 말하면 만우절의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내가 경험한 사실이다. 2년 전에 시작된 그 이야기를 기록한다.
봄을 맞는다는 뜻의 보춘화, 일명 춘란이 보고 싶어 한라산 계곡에 홀로 갔다. 절정의 꽃을 기쁘게 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카메라는 어깨에 걸친 후 배낭을 벗어놓은 곳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식나무 빨간 열매가 보인다. 가거도에서 진한 추억을 가진 식나무, 제주에서도 꽃과 열매를 보았기에 그냥 지나쳐도 괜찮을 나무이다. 그러나 인사차 인증컷이라도 남기려고 핸드폰으로 찍는 순간, 발 디딘 곳이 무너지며 절벽을 굴러 거꾸로 처박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낙상사고에 놀란 몸이 왜 이리 불편할까? 자세를 바로잡는 순간 앉았던 돌이 넘어지며 다시 아래로 굴러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정말 어이없는 2차 사고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어안이 벙벙했다.
왼쪽 다리 정강이뼈가 부러졌고, 왼손 새끼손가락 첫째 마디가 위로 튕겨졌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상황이라 아픔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살폈다. 간신히 안경을 찾아보니 안경테는 찌그러졌으나 다행스럽게도 안경알은 멀쩡했다. 어깨에 메었던 카메라는 렌즈가 떨어져 나가고 렌즈의 흔적만 흙이 묻는 채 열려 있다. 떨어져 나간 렌즈를 주워 재킷 주머니에 넣고 뒤를 돌아보았다.
살아나려면 반드시 핸드폰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뇌와 허리는 다치지 않아 엉덩이로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손가락을 다친 왼손의 손바닥과 오른손을 땅에 짚고, 오른발로 버티며 엉덩이를 옮길 수 있었다. 떨어졌던 절벽 가까이의 비탈을 다시 올라갔다. 덜렁거리는 다리, 젖혀진 새끼손가락도 무시하고 온 힘을 다해 용을 썼다.
2m 정도를 올라가 주위를 살펴보니 저 멀리 엎어진 핸드폰의 까만 카버가 보인다. 안도하는 가슴의 소리를 듣고 다시 엉덩이를 옮겨 핸드폰을 잡고 화면을 보니 켜진다. 전에 이곳에 함께 왔던 지인에게 전화를 누르니 신호음이 간다. 아~ 이젠 살았구나! 15분 동안의 절체절명의 순간들. 아찔, 쿵, 덜렁, 꺾임, 피, 절박, 질질, 핸드폰, 신고
절벽에서 거꾸로 처박힌 것은 거꾸리개고사리를 촬영하는 자세와 닮았다. 거꾸리개고사리는 한라산 등산로의 돌계단에 서식하고 있어 머리를 등산로 바닥에 거꾸로 처박아야 촬영할 수 있다. 거꾸리개고사리를 찾으러 한라산에 2번 올랐고, 포자낭을 보러 한 번 더 올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