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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May 17. 2020

삼국지 덕후가 되다.

삼국지 영걸전, 공명전, 조조전 편


 국민학교 6학년 때, 동네 친구 S군의 집에는 386 컴퓨터가 있었다. 콘솔용 게임기인 슈퍼패미컴을 가지고 놀기 시작하던 나에게 그곳은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S군이 당시 즐겨하던 게임은 다름 아닌 삼국지 영걸전.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스 게임이었는데,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유비와 그의 두 의형제 관우, 장비가 반동탁 토벌군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한 황실을 부흥하는 엔딩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게임으로 KOEI라는 일본 제작사에서 만들었다. 


 게임의 장르는 턴제 RPG 게임으로, 자신의 턴에 아군의 유닛들을 움직여서 싸우고, 제한된 턴 안에 승리 조건을 만족시키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방식이다. 실시간이 아니라서 고민을 충분히 하고 움직여도 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게임이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비, 관우, 장비는 레벨 1부터 시작하는데, 경험치 100이 되면 레벨이 상승하는 방식이다. 특히 소설과 같이 장수들 간의 일기토(대장전, 전투 전에 장수들끼리 일대일로 겨루는 것)을 보면 레벨업과 함께 적장이 자동 퇴각하는데, 첫 전투인 사수관 전투에서는 관우와 화웅, 호로관 전투에서는 장비와 여포가 일기토를 하는 식이다. (대부분 승리하는 장수가 왼쪽에 등장한다.)


 전투 도중 저장 기능이 없고, 반격 기능이 없어서 제법 난도가 높은 게임이었는데, S군이 게임을 하면 옆에서 구경을 하면서 같이 엔딩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역사대로 죽지 않으면 이후로 오리지널 스토리가 시작되는데, 개인적으로 황충과 엄안, 두 노장이 전사하는 전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업성 전투에서 조비를 이기고, 사마의를 이기고 나면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조조가 살아 돌아오는 기현상을 목격하기도 한다. 당시의 충격적인 조조의 부활에 상당히 놀랐고, 조조가 강해서 정말 힘들었다. 만약 전투에서 실패하면 첫 전투부터 다시 세 번의 전투를 해야 한다. 


 영걸전에는 재미있는 버그가 존재했다. 전투 화면이 아닌 평상시 화면 한쪽에 자리 잡은 유비의 얼굴을 마구 클릭하면 금단의 명령어를 실행할 수 있고, 유비의 레벨을 99로 만들어준다. 이 방법을 사용하려고 게임을 시작하면 항상 유비 얼굴을 미친 듯이 클릭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윈도우 95, 윈도우 98이 나왔던 시기. 영걸전의 후속작인 삼국지 공명전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유비의 쏘울 메이트이자 그의 책사, 군사였던 제갈공명의 스토리를 담은 이야기로 제갈량이 삼고초려 후 등장하는 박망파 전투부터 게임이 시작된다. 제갈공명이 주인공이라 유비, 관우, 장비 등 영걸전 당시에 주력으로 쓰던 장수들은 대부분 초반에 죽는데, 장수들에 애정을 쏟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여러 번 했었다. 


 공명전의 가장 큰 특징은 일기토였는데, 무려 대부분의 일기토를 동영상으로 제작한 데다가 한국어 더빙까지 해서 일기토를 보는 것이 게임의 묘미였다. 시기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후반부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라서 조자룡이 메인으로 등장을 하며, 덕분에 일기토 동영상에서도 조자룡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장면부터 오리지널 스토리가 벌어지는데,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늙어가는 제갈량을 볼 수 있고, 마지막에 제갈량이 한 황실을 부흥하면서 유비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이야기로 엔딩을 맞이한다.


 영걸전과 마찬가지로 공명전에서도 버그가 존재했는데, 전투 도중에 ‘총퇴각’을 하면 전투에서 얻은 경험치가 그대로 유지된 채 전투를 재시작할 수 있는 버그였다. 이는 남만 정벌 첫 전투에서 유용하게 이용되었는데, 첫 턴에서 조자룡과 금환삼결의 일기토가 있기 때문이다. 일기토 보고 총퇴각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조자룡만 레벨이 엄청 높아져서 게임 클리어가 한결 수월했다. 영걸전에서의 유비 역할을 공명전에서는 조자룡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영걸전과 공명전으로 끝이 나는 듯했던 시리즈는 몇 년 후 다시 돌아왔다. 일본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한국에 정식 수입이 불가능했던 3, 4편의 뒤를 이서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삼국지 조조전이었다. 공명전과 조조전 사이에 두 개의 작품이 더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그래픽 수준이나 난이도, 밸런스 등이 가장 좋았고, 조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기존 시리즈와는 아예 다른 전개가 진행되었다. 조조 입장에서 새로 쓰는 삼국지랄까. 조조전에서는 중간중간 조조에게 선택지가 주어지는데, 이 선택지에 따라 사실 엔딩, 가상 엔딩, 황제 엔딩의 3가지가 존재한다. 사실 엔딩은 역사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결국 조조가 천하를 통일하는 이야기. 황제 엔딩은 조조가 황제로 등극하는 엔딩인데 사실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충격적인 것은 가상 엔딩이었는데, 전작의 주인공인 제갈공명에게 마왕이 강림하는 시나리오가 전개된다. 방통이 죽고, 유비가 죽는 것이 모두 마왕 제갈량의 음모였다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이를 막기 위해 유비가 죽기 전 관우를 조조에게 보내고, 오장원에서 조조가 제갈량을 무찌른다는 엔딩으로 전개된다. 이 충격적인 전개에 처음 게임을 하다가 한동안 멘붕에 빠지기도 했다.


 조조전은 크게 게임을 좌우하는 버그는 기억나지 않지만 시스템적으로 난이도 조절이 가능했다. 먼저 앞선 두 시리즈와는 달리 전투 도중 세이브와 로드가 가능해 일명 세로신공(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세이브와 로드를 반복하는 현상)으로 난이도가 낮아졌다. 또, 적군 레벨이 아군 평균 레벨에 맞춰져서 주력 2, 3명(주로 조조, 하후돈, 전위)만 키우고 나머진 낮은 레벨의 장수만 내보내면 게임 난이도가 상당 부분 저하되는 경우가 있었다.


 조조전을 끝으로 더 이상 개발된 시리즈는 없다. (아, 진삼국무쌍과 콜라보한 진삼국무쌍 영걸전이 있기는 하지만 콘솔 게임이고, 이 글에서 다룬 게임들과는 궤가 다르다.) 하지만 네이버 카페에 조조전 카페가 있는데, 여기서 능력자들에 의해 신규 개발되고 있는 조조전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MOD(Modification)으로 여전히 게임의 수명이 유지되고 있다. 개중엔 오히려 원래의 삼국지보다도 시나리오가 좋은, 소설로 내도 좋을만한 것들도 꽤 있는 편이다.


 영걸전, 공명전, 조조전. 이 게임들을 하면서 나는 삼국지를 여러 차례 읽었다. 게임을 위해서라도 책을 읽는다면, 게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게임 덕후가 삼국지 덕후가 된 이야기. 그 배경은 바로 이 세 게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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