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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Jun 17. 2020

취생몽사

동사서독 편

  필자는 책을 읽을 때 장르를 그다지 가리는 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볼 때도 국적,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다. (단, 단편 영화나 다큐 영화는 조금 더 심사숙고한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비교적 많이 본 영화가 중화권 영화인데, 단연 최고라고 꼽을 수 있는 영화가 몇 편 있다. 누구나 다 알법한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주성치와 주인이 열연한 <서유기 - 월광보합, 선리기연>(이 영화는 두 편이 이어지는 영화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이다.


  이 영화의 감독 왕가위는 한국에도 꽤 유명한 감독이다. 대표작으로는 <열혈남아>, <아비정전>, <중경삼림>.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일대종사> 등이 있다. 30대 이상이라면 최소한 한, 두 편 이상은 보지 않았을까 싶은 영화들이 많다.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장국영, 양조위, 임청하, 장만옥, 양가휘, 장학우, 유가령, 양채니 등 주연급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 영화로, 러닝타임은 비교적 짧은 100분이다. 1994년작으로, 2000년대 후반, 감독이 직접 재편집한 <동사서독 리덕스>도 있으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94년 원작을 선호하는 편이다.


  <동사서독>의 기본 배경은 김용 작가의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따왔다. 다만 그 주인공이 아닌 전대의 고수들, 천하 오절인 구양봉, 황약사, 홍칠공이 등장인물로 나온다. 그리고 모용연, 모용언도 등장하는데, 고소성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천룡팔부에서 등장한 '모용 가문'의 후예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김용의 무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무협 영화겠거니 하고 영화를 보면 후회할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 영화는 무협 영화가 아니다. 다만, 무협 세계가 바탕일 뿐이다. 


  주인공은 <사조영웅전>에서도 메인 빌런으로 큰 활약을 한 서독 구양봉(장국영).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멋짐을 뽐내며 백타산을 떠나 사막에서 살인 중개업을 하는 에이전트 역할을 맡고 있다. 해마다 복사꽃(도화)이 피는 계절이면 홀연히 찾아오는 동사 황약사(양가휘). 그는 구양봉에게 마시면 모든 걸 잊게 해주는 '취생몽사'라는 술을 준다. 하지만 마시지 않는 구양봉. 황약사는 홀로 취생몽사를 마시고 사막을 떠난다.


  모용연(임청하)이 구양봉을 찾아온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배신하고 떠난 황약사를 죽여달라는 청부를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모용연과 똑같이 생긴 그의 여동생 모용언 역시 구양봉을 찾아와 황약사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대신 모용연을 죽여달라고 한다. 사랑이 형제보다 중요한 것일까? 구양봉은 모용연이 여동생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용연과 모용언이 동일 인물임을 알게 된다. (이중인격). 그리고 얼마 후 그(혹은 그녀)는 사막을 떠난다.


  완사녀(양채니)가 구양봉을 찾아온다. 동생을 죽인 태위부의 검사들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하지만 돈이 없어 달걀과 당나귀를 가져온 그녀의 제안을 구양봉이 거절하고, 그녀는 구양봉의 거처에서 도와줄 사람을 기다린다. 그때 나타난 맹무살수(양조위). 시력을 잃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며 살인청부 일을 하기로 한다. 그는 아내가 친구와 정을 통했는데, 그 친구가 황약사였다. (왜 우리 황약사를 바람둥이로 만드는 겁니까 ㅠㅠ) 마적단을 제압하려던 그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젊은 검객 홍칠(장학우)이 구양봉을 찾아온다. 그는 맹무살수가 미처 하지 못한 마적단을 제압하고, 구양봉의 의지와 다르게 달걀 한 개만을 받고 완사녀의 복수를 이루어준다. 대신 손가락 하나를 잃은 홍칠은 아내와 함께 떠나고, 구양봉은 그에게 검 대신 주먹을 쓸 것을 일러준다. (그래서 홍칠은 항룡십팔장을...)


  마지막에야 구양봉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왜 구양봉이 백타산을 떠나 혼자 사막에서 생활하는지, 황약사는 왜 복사꽃이 필 때마다 구양봉을 찾아왔는지, 황약사가 구양봉에게 준 취생몽사의 출처가 알려지게 된다. 더 이상 황약사가 구양봉을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구양봉은 자신의 거처에 불을 지르고 사막을 떠난다. 


  사실 이 영화는 상당히 불친절하다. 액션씬도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다. 등장인물들은 같은 패턴으로 구양봉의 거처에 등장했다가 사라질 뿐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보고 나면 처음의 의미 모를 장면들이 연결이 되고, 비로소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누구나 산 너머를 궁금해 하지만 그 산 너머에는 또 다른 산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산 너머를 알고 싶어 옆에 있는 소중한 것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 산 너머를 알고 나서 돌아왔을 때 그 소중한 것이 그대로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랑은 잃고 나야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기억하자. 사랑은 옆에 있을 때, 가지고 있을 때 더 노력하고 잘 챙겨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꼭 함께 말이다.


  취생몽사. 그것은 결국 구양봉에게 보내는 술이었다. 자신을 잊어달라는. 아니,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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