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하게 시작했던 관계들이 있었다.
여느 관계라도 처음은 다 상큼하지 않았으랴.
관계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새로움은 점차 휘발되었다.
휘발된 그 새로움의 자리에는
안정감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애정했고 이해했다.
그때는 그런 줄 알았다기보다는
그때는 정말 그랬다.
그래, 그랬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안정감이 휘발되기 시작했다.
휘발된 그 안정감의 자리에는
또 무엇이 차오를까.
하지만 안정감이 휘발된 빈자리에는
어떤 것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냥 텅 비어버렸다.
덩그러니 빈 공간이 어색해서
무던히 애도 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제는 텅 비어버린 관계를
더욱 또렷하게 마주할 뿐이었다.
내 쪽에서 애쓰지 않으면 멀어질 관계.
그래, 우리 관계는 그런 거였다.
이제는 놓아줄 시간이 되고야 말았다.
어쩌면 한참 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어.
관계의 수명, 그 끝자락에서
함께한 시간을, 함께한 추억을 되짚었다.
아직 남아 있는 너에 대한 약간의 애정 덕분에
추억은 추억대로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었어.
이제는 정말로 너를 흘려보낼 수 있어.
고마웠어.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