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에게 외쳐
'20대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유튜브에서 가끔 이런 썸네일을 본다. 기회가 있다면 누구나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다. 지금보다 젊은 때로 돌아가서 후회되는 선택을 바로 잡고, 현재가 더 나아지길 원한다. 유튜브에서 50대 아저씨가 20대 자신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봤다.
'너무 일만 하지 마. 다 허망하게 지나가더라'.
젊었을 때 본인을 위한 시간이 없으셨던 걸까. 아저씨는 평생을 일만 해서 시간이 허망하게 갔다는 얘기를 하셨다. 만약 70대가 돼서 다시 영상을 찍는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으실까.
'50대도 늦은 나이가 아니더라. 지금이라도 너의 인생을 살아.'
30대에 들어서니 20대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히 해줄 만한 조언이 없다. 만약 운동을 하고 살을 빼라는 얘기를 한다 해서 20대의 내가 그 말을 새겨들을까. 당장 지금도 운동을 게을리하는데 과거의 내가 조언을 들을 리 만무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한 번도 달성한 적 없는 목표가 다이어트였다. 158cm에 68kg, 옷을 입어도 태가 나지 않고 얼굴의 윤곽은 살에 파묻혔다. 그런데 27살부터 일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딱히 식사양을 조절한 것도 아닌데 계속 살이 빠졌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앞자리가 5로 바뀌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다행히 결혼식은 아담한 체형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결혼생활 2년 차, 독일에 온 이후 활동량이 급격히 줄었다. 결국 몸무게는 다시 6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안 하는 운동을 그때의 나라고 제대로 할까 싶다. 과거의 나에게 조언한다는 건 현재의 나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지금의 내가 바뀌어야 한다. 20대에 힘들었던 다이어트는 지금도 어렵다.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오늘부터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유튜브를 보며 크로스핏을 따라 했다. 맨 몸 운동을 시작하자마자 몸에서 땀이 났다. '고강도 운동이니까 이 정도면 됐지' 대차게 시작한 운동은 10분 만에 끝났다. 안 쓰던 근육을 써서 다리가 후덜거렸다. 근육통이 오기 전에 책상 밑에 발 받침대로 쓰던 폼롤러를 꺼냈다. 이번엔 숏츠를 보며 폼롤러 스트레칭을 따라 했다. 폼롤러의 단단한 부분이 근육 곳곳을 지긋히 눌렀다. 30대가 되니 운동 부족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20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지금 나에게 하면 돼.
운동 다음으로 떠오른 건 새로운 분야에 대한 공부였다. 공대생이었지만 영어가 좋아서 영어 교육을 복수 전공했다. 20대 내내 영어만 가르쳤는데, 막상 독일에 오니 할만한 일이 없었다. 회사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내세울만한 경력도 없었다. 백수와 주부로 허송세월하며 4개월이 지났고, 결국 한국에 있는 플랫폼으로 온라인 영어 회화 수업을 시작했다. 보통은 일주일에 6시간 정도 짧게 하지만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만나는 학생들 대부분은 직장생활과 영어 공부를 병행하며 자기 계발에 노력하고 있다.
지난 수업 때 학생 한 명에게 이런 질문을 건넸다.
'만약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걸 해보고 싶어요?'
그는 영어 공부를 위해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영어 공부를 더 일찍 했으면 지금쯤 외국인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해외 지사에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는 영어회화를 더 일찍 공부하지 않아서 후회된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나는 그 학생이 부러웠다. 12년간 한 분야에서 꾸준히 커리어를 쌓고 마흔이 되어서도 영어 공부를 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서로의 푸념을 늘어놓다 그에게 내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10년 내내 영어만 가르쳤는데 막상 해외에 나와보니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요즘 세상에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걸 배워보고 싶어요.'
독일에는 직업 교육이 잘 되어 있고 배울만한 의지가 있다면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혜택을 누리려면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 만약 20대 나에게 '혹시 독일로 이민을 갈 수 있으니 독일어를 배워두렴.' 이렇게 말을 하고 싶지만 웃음이 나왔다. 현재 독일에 살면서도 독일어 공부가 어렵고 가끔은 포기하고 싶은데, 무슨 염치로 이런 조언을 할 수 있으려나.
오늘을 기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나는 인생에서 경험이 있는 연장자로 사는 중이다. 말 그대로 태어나서 가장 나이가 많은 모습이다. 한 달, 일 년이 지나면서 좋고 나쁜 경험이 차곡차곡 쌓인다. 기분 좋은 기억이 가득하면 좋겠지만,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는다. 쓰린 경험이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나를 아프고 힘들게 했던 그 경험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책으로 읽는 교훈과는 다르다. 경험을 토대로 작은 변화를 만든다면 조금씩 성장할 수 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때에, 겪고 나는 느낀 깨달음이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인생은 새옹지마, 힘들게만 느껴진 시간이 나를 단련시키고 어제보다 1% 나은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영어원서로 읽은 '5am club' 책에서 Zero is waste라는 문장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0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아깝게 흘러가는 우리의 시간과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경험이 숨죽이며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헤맨 만큼 자기 땅이라고 하지 않는가. 헤매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서서히 땅으로 꺼져만 갈 것이다.
하루는 시간을 내서 인생 그래프를 그렸다. 고작 30년 살아놓고 인생 그래프라고 칭하기 죄송스럽지만 연도별로 기억나는 일들을 기록했다. 잘한 일도, 후회되는 일도 있었다. 그때의 나와 대면한다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현실적인 대안만 떠올랐지만 일단 종이에 적었다. 그때의 나는 바꿀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바꿀 수 있으니까.
과거를 기점으로 우리는 가장 나이가 많은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미래로 눈을 돌리면 인생에서 가장 젊고 빛나는 하루를 살고 있다.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니 1년 그리고 5년 뒤에도 똑같은 후회와 자책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 하지 그랬어' '그거? 지금 할게.'
과거는 내 손을 벗어났지만 현재와 미래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