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채우는 어린 시절 나의 일기장처럼
1996년 4월 8일 (월요일) 날씨 : 맑음
제목 : 쑥
오늘 지영이와 시은이와 난 추산공원에 있는 수도산에 가서 쑥을 캤다. 시은이는 나와 지영이에게 벚꽃도 따주었다. 난 쑥을 캐다가 넘어져서 조금 다쳤는데, 집에 와서 보니 아무 일 없었다. 그런데 시은이와 난 부지런히 쑥을 캤는데, 지영이는 우리만 따라다니며 놀기만 했다. 쑥을 캐는 중 너무 쑥 냄새가 좋아 우리들은 한동안 멍한 적도 있었다. 쑥을 캐니 봄이 다 가는 것 같았다. 개나리도 땄는데 봄이 한결 더 느껴졌다. 쑥을 캐는 동안 봄을 느꼈다.
1996년 8월 16일 (금요일) 날씨 : 맑음
제목 : 샤워
집에서처럼 샤워 시설이 그리 잘 되지 않은 할머니 댁에서 샤워를 했다. 어떻게 했게? 어디서 했냐면! 바로 마당에 얇은 이불을 걸쳐놓고 가려서 했다. 집에서 하는 것 보다는 밤이라 좀 추웠지만, 집에서보다 개운하고 시원하고 좋았다. 덕분에 감기라는 친구가 생겼지만 말이다. 정말 느낌은 좋았다. 개운하고 상쾌한 느낌! 이제까지 내가 해본 샤워 중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는 샤워였다.
책장 한쪽에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쓴 일기장이 여러 권 꽂혀있다. 일기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름대로 솔직하게 쓴 일기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빨간색 A+를 받기 위해 애를 쓴 티가 나는 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우기를 일기를 잘 쓰려면 하루에 겪었던 모든 일을 나열하기보다는 그 일을 경험하며 내가 느끼고 생각한 점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과하게 생각과 느낌을 강조하는 일기들이 많았다. 어떻게 썼든 간에 1996년, 6학년의 내가 쓴 글을 보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읽다 보면 잠시 나도 6학년이 되어본다. 친구랑 싸우고 속상해하는 어린 나에게 연민도 가져보았다가,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에 함께 두근거리고, 수학여행 전날 함께 설레기도 하며 그 시절로 빠져든다.
작년 봄, 동네 책방 ‘책방 19호실’에서 김달님 작가님의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독서 모임이 있었다. 각자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몇몇 분들은 편지를 낭독했다. 내가 쓴 편지는 끝까지 내 손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분들의 글은 한없이 멋져 보이는데 내 글은 부끄러웠고 초라해 보였다. 나는 글쓰기가 자신이 없었다.
올해 초여름, 같은 장소에서 수미 작가님을 만났다. ‘쓰는 우살롱’ 모임으로 <사치, 노래>의 주제로 자유롭게 글을 써가서 낭독하는 자리였다. 처음엔 그냥 수미 작가님을 만나고 싶어 신청했고, <노래>를 주제로 아주 짧은 글을 써갔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내 글을 낭독하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무대 앞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 글을 보이는 건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리는 일이었다. 여전히 나는 글쓰기가 자신이 없었다.
올해 여름, 아이들 학교의 방학은 유난히 길었다. 두 달이라니.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이들과 태국 치앙마이로 한 달 살기를 떠났다. 즐거웠던 일도, 힘들었던 일도 많았던 시간이었다. 그 여행으로 한 가지 남은 것이 있다면 35일간 매일 쓴 나의 일기장이다. 아마 6학년 때 이후로 처음 쓴 일기장이 아닐까. 매일 밤 자기 전 아이들과 식탁에 모여 앉아 일기를 썼다. 글쓰기라면 치를 떠는 아들은 괴발개발 날아가는 글자로 한두 단어를 쓰기도 했고, 글자 쓰기가 귀찮았던 딸은 간혹 그림으로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시간이 좋았다. 어떤 경험을 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감정을 되새기기도 했다. 엄마가 쓴 일기를 읽고 그때를 회상하며 웃어대는 아이들의 모습도 좋았다.
올해 가을, 도서관에서 하는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그리고 첫 수업을 들은 3일 뒤 다시 ‘책방 19호실’에서 수미 작가님과 함께하는 ‘쓰는 우살롱’ 모임이 있었다. <몸, 연애, 우울>의 주제 중에서 연애를 주제로 <아들과의 연애>라는 글을 써갔다. 초여름에 글을 낭독하며 부끄러웠던 마음은 여전했지만 아주 조금은 내 글을 보이는 데 자신감이 생겼다.
6번의 글쓰기 수업을 마무리하는 지금, 아직도 내 글은 부끄럽다. 매 수업 시간 전, 인쇄되어 다른 글들과 함께 엮인 내 글을 보면 여전히 얼굴이 빨개진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글을 쓰며 내가 선명해짐을 느낀다. 인생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글로 써가며 나를 완성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글을 더 쓰게 될지, 사실 글을 더 쓰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글쓰기를 대하는 나의 작은 변화가 즐겁고, 글 쓰는 시간이 즐거웠으니 그거면 됐다! 책장에 꽂힌 6학년 나의 일기장처럼 훗날 시간이 지난 후 지금 쓴 글을 읽으면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