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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재비 Dec 23. 2023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된 45일

홀로 떠난 태국 배낭여행


  25살, 내 손에 쥐어진 첫 퇴직금 이백몇십만 원. 나는 무작정 태국으로 떠났다. 마음을 먹고 나니 준비는 간단했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45일간 나의 여행을 함께 할 배낭도 샀다. 일단 저질러 놓고 통보하는 딸을 보며 엄마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하셨지만, 나의 의지는 꺾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통금시간까지 있었을 만큼 엄했던 우리 집. 나의 첫, 아주 대단한 반항이었다.

  2009년 4월 8일, 드디어 출발! 14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설렘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 여행으로 인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 여행을 통해 어떤 것들을 얻게 될까. 내 키의 반이나 되는 15kg짜리 배낭 하나 딱 메고, 손에는 가이드북 한 권 들고. 그렇게 떠났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한 건 새벽 3시, 다들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겠지만 주머니 가벼운 배낭여행자는 그런 호사를 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버스가 운행을 시작하는 6시까지 공항 노숙을 결정했다. 벤치 위에 침낭을 펴고 누워 세상 편하게 한숨 푹 잤다. 눈을 떠보니 주변은 환했고, 공항은 이용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혼자 떠난 첫 배낭여행에 이렇게 맘 편한 여행자가 어디 있을까 하며. 참 속 편하고 겁도 없지. 지금 떠올려 보면 여행 시작부터 모든 순간이 무모하고 충동적이었다.

  내 여행의 시작은 태국의 가장 큰 축제인 송끄란 축제였다. 지나가는 낯선 이들과 웃고 떠들고 서로 물을 뿌리고 얼굴에 알록달록 석회도 발라가며 한데 뒤엉켜 즐기는 시간. 즐거웠다. 정말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즐거웠다. 일거리도 걱정거리도 없이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책도 읽고, 낮잠도 늘어지게 자고, 여유롭게 동네도 산책하며 그렇게 나의 여행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이 여행을 통해 미래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했지만, 막상 여행을 시작하니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태국과 라오스의 몇몇 도시를 여행하며 참 많은 경험을 했다. 10시간 넘는 시간을 달리는 슬리핑 버스를 타고 이동했던 일. 생전 처음 스쿠터를 운전해서 마을 구석구석 다녀본 일. 처음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피자에 초를 꽂아 생일파티를 했던 일. 현지인이 주는 맥주를 마시고 몸이 이상해져 숙소에 가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일. 그토록 먹고 싶던 망고스틴을 발견하고 급하게 까먹다 손톱 사이 껍질이 껴서 염증이 생겨 고생했던 일. 새벽에 일어나 스님들의 탁발 행렬을 넋 놓고 보았던 일. 카오산로드 노점에 앉아 레게머리를 했던 일. 반짝반짝 별로 가득한 태국 빠이의 밤하늘 아래 모닥불을 피우고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던 일.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많이 웃고 때론 울기도 하며 45일을 보냈다.

  긴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6kg이 찌고 새까맣게 탄 내 모습을 보신 엄마는 “아이고. 그냥 다시 가라.” 하며 손사래 치시며 고개를 저으셨다. 45일간의 배낭여행으로 얻은 건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확신 같은 것이 아닌 두둑한 뱃살과 구릿빛 피부였다.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한다. 그 여행으로 인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살아가는 데 아주 큰 힘이 된다고. 그 시간은 내 인생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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