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열세 번째 전화

by 리치

문산행 기차였다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내린 네 명의 대학생들은
반대편 신촌행 기차를 탔다.

그 과정에서 서로 웃음이 터졌고, 잔뜩 경계하고 있던 마음도 조금 풀렸다.
내게 새우깡을 건넨 남학생의 얼굴을 바라보니 불량기 없이 준수한 인상이었다.

그렇게 네 명의 일행은 자연스럽게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바로 옆에 있던
‘SM’이라는 음악다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새우깡의 주인공 남학생은
의대3학년, 의대본과 1학년에 재학 중인 현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현우의 친구 준호는 같은 대학을 다니지는 않지만
한 동네에서 자란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준호는 입담이 좋아 시종일관 우리 네 사람에게 웃음을 안겨 주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나와 유진이는 이름 정도만 알려 주었고
대학 4학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느새 나는 한 살 연하인 그들을
이성적으로 보기보다는 누나의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다며 사양하는 나에게 현우는
극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며 내가 탄 버스에 함께 올라탔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집 위치를 알려주지 않으려고
“여기서 가도 된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현우는 정류장 앞 치과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큰아버지가 저 치과 원장이세요.”


'조성현 치과'.. 그 치과는
나의 아버지가 단골로 다니시던 곳이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이유가
그 순간 설명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을
곧바로 남자친구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결국 집 앞까지의 배웅은 허락하지 않은 채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8일이 지난 일요일 오후.

집 전화가 울렸고
마침 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혹시 민은영 씨 댁인가요?”

“그런데요. 누구세요?”

“저… 조현우예요.”

순간 심장이 멎는 듯 놀랐다.

“어떻게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았어요?”


그는 대답 대신
집 근처 놀이터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망설였지만
집 위치까지 알고 있는 그가
도대체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둑해진 놀이터.
그는 그네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인사도 하기 전에
다짜고짜 물었다.


“우리 집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현우는 말 대신
주먹 쥔 손을 펼쳤다.

그 안에는
십 원짜리 동전 몇 개와
구겨진 메모지 한 장이 접혀 있었다.

메모지에는
스물여섯 개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전화를 걸 때마다
하나씩 지워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열세 번째 줄에서
연필 자국이 멈춰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집집마다 한 권씩 놓여있던 두툼한 노란 전화번호부 책을 펼쳐 들고,

성북동에 사는 '민' 씨 성을 가진 집 번호를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낸 스물여섯 개의 번호를 메모해

공중전화박스에서 한 군데씩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세 번째 시도 끝에,

내가 직접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스물두 살 현우의 질기고도 엉뚱한 행동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때는 몰랐다.

그 열세 번째 전화가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조용히 열고 있었다는 것을.



P.S ... 요즘은 보고 싶은 누군가를 찾을 때 SNS의 계정을 찾아내거나 메시지를 띄우곤 하지요.

하지만 스마트폰도, SNS도 없던 그 시절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담긴

두툼한 종이 전화번호부 책을 한 장씩 넘겨야만 했습니다.

이름 하나를 찾기 위해 노란 종이 위로 손가락을 짚어가며 보낸 투박하고 느린 시간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열세 번째'의 간절함으로 닿고 싶었던 누군가가 있었나요?



#동전#전화번호부#공중전화#피카디리#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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