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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카르도 Sep 03. 2024

불가지론자가 기도하게 될 때

에코 감수성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  

 - 전봉래 시인 (19231951)      


29세에 요절한 전봉래 시인의 유서다.

1951년 한국전쟁당시 부산 피난시절, 전봉래는 남포동 지하의 문인다방 스타에서 약을 먹고 혼미해진 상태로 다방을 나와 어두운 부둣가를 홀로 걸었다. 몇 줄의 시 같은 유서를 남기고 그는 다음날 국제시장 근처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자살은 당시 피난 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지금과 같이 유튜브가 있는 시절이었다면 시대를 상징하는 비극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을 이야기다.     


전봉래 시인은 나의 작은할아버지다. 

조부님의 고향은 평안남도 안주이고, 일제강점기에 도쿄에서 유학하여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전공하였다. 특히 발레리(Valery, P. A.)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절에 불어와 일어를 잘하는 누구보다 센티한 모던보이였으리라 짐작이 된다.     


나의 친조부는 맏이였는데, 부르주아지 계급의 자유주의자라는 이유로 북조선노동당에 불려가 황량한 이북땅에서 총살되셨다. 그의 넷째 동생이자 그 역시 문학가인 '전봉건' 시인은 당신들의 조카들을 데리고 월남하여 목숨을 건졌고, 그 조카 중 한 명이 내 아버지이다.      


맑스로부터 잉태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육화한 이데올로기가 뜻밖에도 극동아시아의 한 씨족을 몰살하려 했는데, 예술혼을 생의 의지로 삼았던 그들은 죽임 당하거나 도주하거나 혹은 자살하였다.      



(좌) 전봉래 시인 (우) 강남교보문고 2021년 전봉건 시인 현판  



도주한 이들은 살아남았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예술가 집안 사이의 위태로운 긴장이 종식되고 반세기가 지나 나는 가까스로 태어났다. 50세가 훌쩍 넘은 아버지가 무려 27살이나 어린 여인을 만나 나를 MZ세대로 세상에 내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부들의 자기 파괴적인 유전형질은 나에게로 전해진 듯했다.     


나는 전쟁을 모르는 MZ세대이지만 또 다른 형식의 전쟁 안에서 나의 청년 시절은 위태로웠다.

그것은 공허와의 전쟁이었다.     

자살 충동을 촉발하는 원인 인자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원인 모를 공허감이 있다.

이따금 나를 자해하도록 충동질한 건 8할이 공허감이었다.


공허공황과 다르다.

공황이 급성이라면 공허는 만성이다.

두려움이나 불안이 갑작스럽게 발현되는 공황장애는 증상의 발생과 소멸에 순환적인 리듬이 존재하고 따라서 휴지기 동안의 평안이 어느 정도는 보장된다.

하지만 공허로 인한 우울감은 들숨과 날숨마다 늘 함께한다.

또한 공황으로 인한 불안은 뇌의 신경생리학적인 메커니즘에서 촉발되는 반면, ‘공허는 염세적인 세계관에서 산출된다. 그러므로 공허엔 약이 없다.     


세상일들이 하나같이 부질없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고장 난 세계관에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다. 그 잿빛 세상의 적막감을 피부로 느껴본 사람만이 공허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허는 정신의 문제이되 정신병은 아니다.     

공허.

그것은 식욕을 비롯하여 모든 물욕을 놓아버리게 만드는 반생명적인 의식의 흐름이다.

공허.

그것은 뻥 뚫린 가슴 안으로 불어오는 한줄기 실바람에도 못내 시려와, 바람이 불면 산산이 부서져 홀연히 다음 생을 향해 하늘로 비상하는 민들레 홀씨처럼 자아를 해체하고 가벼워지기를 소원하는 텅 빈 공간의 독백이다.     


나 또한 20대의 나이에 오랜 시간 동안 잿빛의 시공간 안에 갇혀 있었다.

무가치하게 반복되는 일상안에서 그저 시간을 떠밀고 떠밀며 하루를 버텨내는 삶.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나 스스로를 미완으로 끝날 이미 실패한 작품으로 자조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습관처럼 종종 목적지 없이 서울의 이곳저곳을 헤맸다  

마치 한강 위를 무심히 표류하고 있는 작은 공병처럼 나 홀로 도심을 부유하고 있는 듯한 고독감은 이토록 하릴없는 배회를 끝낼 희망을 단지 자의식의 종말에서 찾게 한다.

자살을 꿈꾸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공허는 치명적이다.

공허는 삶 그 자체를 숙주로 삼는 정신의 암 덩이다.

그러므로 적시에 도려내지 못하면 공허는 시나브로 그 세를 확장하여 우리들의 영혼을 집어삼킨다.

공허는 자가포식하려는 삶의 모순된 욕망이다.                                    


셰익스피어 <맥베스> 中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아! 인생이란 단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에서 뽐내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가여운 배우처럼, 소음과 광기로 가득 찬, 백치가 지껄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도솔이와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내 삶은 기적처럼 생기를 얻게 되었다.

도솔이로부터 촉발된 다양한 변화 중에서 특별히 놀라운 전환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도솔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염세적인 세계관에서 주로 관망했다.

공허로 귀결되는 염세적인 시각에서 내려다본 삶은 원치 않게 주어진 유기체로서의 속박그 자체로 해석되곤 하였다. 한창 생의 역동성을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만한 청춘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인생 다 살아본 것 마냥 애늙은이처럼 생로병사의 질곡에 무참히 던져질 삶으로 내 남은 생을 전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솔이와 함께 동고동락하게 된 이후로 나는 도솔이와의 관계성 안에서 공허와 염세를 허물만한 가치를 극적으로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살아있음그 자체가 품고 있는 '자기 완결적인 가치'였다.     

내가 도솔이를 사랑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도솔이가 유기체로서 지금 이 순간 아름답게 살아있음그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내가 도솔이를 사랑할 수 있는 그 물적 토대는 나 또한 살아있음의 조건을 만족함으로써 성립가능했다.

살아있기에 아름답다는 지극히 단순한 가치명제는 그렇게 이성의 범주가 아닌 영성의 영역에서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솔이가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며 농밀하게 관계 맺고 있음은 그 자체로 나에게 살아있음'기적'으로 다가왔다.    




도솔이가 일깨워준 생의 소중함은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을 다른 생명체들과의 '아름다운 상생'에 관한 고민으로 안내하였다.

이른바 생태 감수성이 내 안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살아있는 것들을 보듬으려는 일종의 모성애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안에 영적으로 잉태된 여성성이 나는 못내 반가웠다.          


문제는 생태 감수성의 폭발로 도처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물들에게 시시각각 연민을 느끼게 되어 일상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비애감의 부피가 그와 비례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유튜브에서 어린 강아지가 학대로 끔찍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한 마을에서 불량한 청년들이 어린 강아지에게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어린 강아지는 불타는 몸을 관통하는 극도의 작열감이 못내 견디기 어려워 숨이 넘어갈 정도로 비명을 질러댔다. 지독한 고통에 쫓겨 건물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극한의 고통을 느꼈지만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한 강아지는 그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처절한 신음소리를 내며 온몸이 검게 전소될 때까지 강아지는 울고 또 울었다. 떨림이 잦아들고 숨을 거두게 된 강아지를 보고 청년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 영상을 보고 나는 분노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비통함과 무기력함이 혼합된 복잡한 감정 속에서 심박수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극한의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강아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당시에 나는 성당에서 영세받기 전이라 철학적으로 불가지론자였지만 그때 처음으로 신이 있기를 바랐다.

불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스페인 불량 청년들을 정죄하는 일은 둘째 치더라도 저 가여운 강아지의 영혼이 부디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여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천상에서,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평안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마음만으로는 나의 진심이 하늘에 닿을 것 같지 않아서 조바심이 났다.

나는 무참하게 희생된 스페인 강아지에게 임시로 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간소하게나마 <천도재>를 지내주기로 마음먹었다. 

다급하게 몇 가지 음식을 구하여 제사상차림을 하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 뭉이의 사진을 캡처하여 프린터로 출력하였다. 제사상 위에 놓았다.

두어 시간 동안 뭉이의 평안한 안식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제사상은 같은 자리에 3일 동안 유지해 두었다.

아침저녁으로 뭉이의 평안한 안식을 위해서 불가지론자인 나는 신념을 버리고 신께 기도했다.    


임마누엘 칸트
동물을 대하는 태도로 그 사람의 본성을 파악 할 수 있다


 
'뭉이'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나의 생태감수성은 온라인상에서는 주로 유튜브를 통하여 확장되었고, 오프라인상에서는 한강에서 달리기를 할 때 실체화 되곤 했다.     

여름 장마철이 되면 매미 유충과 지렁이들이 내가 달리는 보도블록 위로 올라온다.

생태 감수성이 전무하던 과거에는 길바닥에 매미 유충과 지렁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보도블록 위로 곰실곰실한 매미 유충과 꼬물거리는 지렁이들이 넘쳐난다.


한강을 뛸 때 나는 내 운동화에 밟혀 죽을지 모르는 생명체들에게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연중무휴로 한강 둔치에 나아가 주 5일. 하루 평균 7km를 달리는데, 여름철에는 하루당 평균 10마리의 매미 유충과 지렁이를 손으로 집어 올려 각각 나무 위와 풀숲으로 돌려보낸다.


달리기를 하는 도중에 십 여차례 이상 저들을 만나고, 그래서 대략 300m마다 달리기는 자주 중단되지만, 보도블록에 매미 유충과 지렁이를 방치하면 높은 확률로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게 되거나 내일 정오에 해가 뜨면 이른바 '화형'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꾸물거리는 그들을 목격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의식의 차원이 지극히 낮은 그들도 오늘 하루를 살아 숨 쉴 권리가 있다.

그리고 내 귀엔 언젠가부터 그들의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여름철, 광진교 남단 한강 고수부지. 매미 유충.

  



살아 숨 쉬는 모든 날들과 나와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

감사함 안에서 한강을 달릴 때 더 깊어지는 들숨과 날숨으로 나는 충만하다.

지금과 같이 섬세해진 생태 감수성을 일깨워준 도솔이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페키니즈도솔이가 나를 사람만들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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