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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카르도 Sep 25. 2024

인권 말고 견(犬)권

‘종차별주의’에 반대하며

모든 동물은 생태계에서 존재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권리의 평등은 개체와 종의 차이를 가리지 않는다

세계동물권리 선언 제1조의 외침이다.      

 

세계동물권리 선언은 1978년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선포되었다.

갯과 동물인 도솔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사람과 동일한 생명권을 갖는다고 세계동물권리 선언은 주장한다. 비록 도솔이의 견()권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나의 보편적 인권과 동일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써 도솔이가 사람과 무차별하게 존엄하다는 신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나와 같은 반려인들의 입장에서 세계동물권리 선언은 수용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정의로운 명제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이야기다. 대부분 고심해보지 않았겠지만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종차별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에 반대한다.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에 따르면 종차별주의<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종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다른 종의 이익을 배척하는 편견 또는 왜곡된 태도>로 정의된다.


단지 단백질 공급원으로써 훌륭히 역할한다는 이유만으로 돼지나 소 또는 개의 삶에 개입하여 그들을 착취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고 나를 비롯한 종차별주의 반대론자들은 생각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단지 사람 좋자고 저들의 배를 가를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차별주의를 거부하는 나와 같은 동물해방론자들의 주장은 그야말로 종을 초월한 생명윤리적 이상을 꿈꾼다.      


내가 이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즉, 반(反)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는 나조차 오늘 점심식사로 서브웨이에서 채소만으로 구성된 베지(Veggie) 샌드위치가 아닌 새우가 들어간 쉬림프 샌드위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 간의 접점을 찾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향한 작은 한걸음들을 잇대어 가면, 반드시 언젠간 가시적인 진보의 변화를 이룬 새로운 세상을 목격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에게 종차별주의는 낯설고, 육식을 하는 동안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느껴야 한다고 종용하는 동물해방론자들의 주장에 불만을 갖는 이들이 대다수인 것은 사실이다.      

      



이따금 나는 경복궁과 명동성당 인근에서 마주치는 키가 큰 서유럽계 백인종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동양인들을 관찰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하곤 한다.

190cm가 훌쩍 넘어 보이는 장신의 그들이 벽안(碧眼)으로 나를 비롯한 동양인들을 쳐다볼 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웃고 있는 표정에서 은밀한 오만함을 엿볼 때가 종종 있다.  


우리가 서유럽계 백인들의 인종차별적인 태도에 불쾌해 본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각자의 메타인지력을 동원하여 이번에는 우리들의 내면세계 또한 동일한 기준에서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과연 동남아시아 관광객들을 바라볼 때, 앞서 지적한 서유럽계 백인 남자들의 시선과 같은 종류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지.


만약 당신이 그런 종류의 시선들을 섬세하게 집어내는 분별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분별심을 토대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인권의 보편성을 지향하는 주장들을 정의로운 것으로 간주한다면, 반갑게도 당신은 동일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종차별>에 관한 생명윤리에 친근하게 접근해 볼 수 있다.     


    



함께 생활하고 있는 반려동물을 비롯하여 여타의 동물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가.


만약 우리가 그들을 우리보다 저급한 존재로 바라본다면 근거는 무엇인가.


작정하고 고심해 보았지만 생각보다 그 근거가 빈약하다면, 이제 다시 우리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관하여 정직하고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될 용기를 얻게 된다.

내가 그랬다.     



   

'반(反) 종차별주의'의 이상




나는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잠복해 있을지 모르는 그릇된 위계 서열에 관하여 자주 자기 검열하는 편이다.

살면서 운 좋게 얻어낸 작은 성취 하나를 매개로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우쭐하고 있지는 않는지.

나에게 유리한 편향된 기준점을 특정하고, 그 기준점에 토대로 남들보다 내가 앞서있다는 착각에 빠져 오만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부단히 자기 검열을 하는 편이다.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우쭐하려는 마음의 싹이 발견되면 그 즉시 나는 그 독버섯 같은 오만함을 하느님과 독대하는 기도로써 뿌리째 잘라낸다. 가톨릭에서 영세받은 이후에 깨닫게 되었다. 남과 비교하며 상하 위계를 추상하는 습관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추악한 일인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위계 없이 평등하다’라고 주장하는 반()종차별주의자들의 이상에 관하여 <그건 너무 나간 것 아니냐>라는 반론이 여론의 주를 이루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들을 가리켜,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다 큰 어른들이 공상적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냐라며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동물권단체 회원들은 그럼 평생토록 채소만 먹고살 수 있느냐고 날이 선 비판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들의 생각을 현실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존중한다.     


다만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은 뒤늦게 거대한 생태 공동체에 합류한 동물들 중 하나의 종일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고, 아울러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나는 다음의 현대사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 싶다.   

  

미국에서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투표가 허용된 시기는 언제일까.

1917년 뉴욕에선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집결하여, 여성 100만 명의 서명이 담긴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시가지 행진을 하였다.      


   

1917년 뉴욕.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의 가두시위



미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은 1920년 미국 수정헌법 제19조의 통과로 비로소 확보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국가인 미국에서조차 여성에게 투표권이 보장된 것은 대략 100년 밖엔 안된 일이다.

뉴욕항에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지고도 35년이 지나고 나서야 미국의 여성들은 투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미국 남성들은 뉴욕시에서 ‘반(反) 성차별주의’를 주장하며 가두 시위하는 여성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건 너무 나간 것 아니냐>라고 비판하며, 현실을 모르는 급진적인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폄훼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 세상의 동물들은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흑인이 백인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닌 것처럼,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들도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 엘리스 워커.  미국의 작가 겸 사회운동가. 1944~현재 >      



한편, 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들 중에서 논리적인 시시비비를 즐기는 일부 학자들은 인간 종이 다른 종보다 우월한 척도로써 자의식이나 자율성과 같은 정신의 힘을 강조하며, 이를 결여한 동물들을 이용하고 착취할 권리를 인간이 갖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현명한 철학자 피터 싱어는 자의식의 측면에서, 혹은 자율성의 측면에서 안타깝게도 동물보다 열등한 지위에 놓인 <중증의 지적장애인>의 존재를 그들 앞에 제시한다.

이른바 가장자리 상황논증 (Argument from Marginal cases)이다.


주지하다시피, ‘지적장애인이나 온몸이 마비된 이른바 식물인간은 자의식과 자율성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도 그 존엄성을 보장받는다.

혹여, 사람과 달리 동물은 예외라고 고집부린다면 그런 방식의 억지는 하나의 논증으로서 허약하다.

논리적 추론의 힘은 언제나 일관성의 가치에 두 발을 딛고 작동되기 때문이다.     




소고기가 우리들의 입맛에 기막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고기의 감칠맛을 깨우친 이들에게 소는 매 끼니마다 욕망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각적 욕망과 영양학적인 필요가 소의 희생과 우리들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은 소고기 미역국을 먹어왔음을 강조하며 역사문화적인 프레임을 들이미는 주장 또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그러한 역사는 단지 우리들이 오랜 시간 동안 소에게 잘못해 왔다는 사실을 소고기 미역국을 먹을 때마다 인정해야 함을 반(反)종차별주의는 환기하기 때문이다.   

< 리카르도. 대한민국의 새내기 브런치 작가>   
종차별주의는 인류가 반드시 파쇄해야만 하는 진보의 마지막 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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