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40만 명, 계열사 80여곳의 버크셔 제국을 건설한 창업자 버핏
워런 버핏,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그는 오늘날의 투자자들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 많은 돈을 투자로 벌어들였기 때문이죠.
그의 공식 직함은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CEO)인데요. 버크셔 해서웨이가 어떤 회사인지 정확히 알고 계시는 분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워런 버핏이 만든 회사니까 투자하는 회사 아니겠어?’라고만 생각하실 분들이 많으실 거 같습니다.
1965년, 그가 35살의 나이에 인수했을 때만 해도 버크셔 해서웨이는 다 망해가던 작은 섬유회사였습니다.
그리고 55년이 지난 오늘날 버크셔 해서웨이 계열사는 80여 곳, 임직원 40만 명의 거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국내 임직원 수가 10만여 명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규모의 회사라는 걸 아실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워런 버핏을 투자 천재로 알고 계시지만 이처럼 그는 초대형 기업의 창업자이자 현직 CEO이기도 합니다. 90세가 된 지금도 직접 회사를 이끌고 있죠.
이번 글에서는 투자의 전설 워런 버핏이 아닌 탁월한 경영자로서의 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그가 버크셔를 오늘날처럼 키우고, 천문학적인 부를 일굴 수 있었던 핵심 역량은 우수한 기업을 적절한 가격에 인수한 뒤 안정적으로 경영해왔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버핏이 인수할 기업을 고르고, 그 회사들을 경영할 때 반드시 지켰던 4가지 원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91년부터 2017년까지 그가 버크셔 주주들에게 쓴 주주서한을 묶어낸 <워런 버핏 바이블>에 담긴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보겠습니다.
버핏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라면 그를 월스트리트의 거물 투자자로 알고 계실 수 있는데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버핏은 월스트리트와는 큰 관련이 없을뿐더러 월가의 투자자와 애널리스트, 대형 투자은행 임원들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주주서한이나 주주총회 질의응답 내용을 보면 그가 월스트리트에 대해서 상당히 큰 불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기업 인수 과정에서 투자은행들은 ‘분석 자료’를 작성하는데, 이 자료를 보면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슈퍼맨 만화가 떠오릅니다.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평범한 기업도 단번에 변신해 경쟁자들을 제치고 이익이 총알보다도 빠르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기업인 워런 버핏은 어떤 원칙들을 갖고 회사를 운영해왔을까요? 먼저 이 4가지 비결부터 말씀드리고 각각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실제 사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버핏의 4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은데요.
첫째, 훌륭한 경영자가 오랫동안 경영할 수 있는 회사만 인수한다.
둘째, 사소한 조건으로 힘겨루기를 하기보다 10, 20년 후에 펼쳐질 사업 전망에 집중해라
셋째, 세상에 좋은 관료주의는 없다. 관료주의의 보이지 않는 해악을 감당하느니 잘못된 결정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감당하는 게 훨씬 더 싸게 먹힌다.
넷째, 돈은 잃어도 된다. 그러나 평판을 잃을 수는 없다. 단 한치도 잃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뉴스레터> 홍자병법의 내용을 블로그에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홍자병법>을 구독하시면 지금 이 글과 같은 고급 지식을 매주 한 편 이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만 입력하시면 바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먼저 한 가지 꼭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저는 그의 지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죠.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하면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실 열성 지지자가 되기에도, 극렬한 반대자가 되기에도 저는 너무 젊거나 혹은 어립니다. 그가 당선되던 해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까요.
이번 글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정치인에 대해서 제법 길게 이야기하는 건 어떤 종류든 그에 대한 개인적 감정 때문은 아닙니다.
최근 수십 년 간 한국에서 그만큼 글을 통해 자신의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쌓아나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냈던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1994년 노무현은 <여보, 나 좀 도와줘>를 출간한다. ‘노무현 고백 에세이’라는 부제와 함께 표지에는 서류 가방에서 쏟아진 잡동사니들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이 90년대 풍의 유머스러운 캐리커처로 그려져 있다.
책 제목 그대로 누가 와서 도와주기만을 바라는 모습이다.
보통 책들보다 작은 손바닥만 한 판형에 230페이지가량 되는 그리 길지 않은 이 에세이집이 그의 첫 책이다.
노무현은 왜 이 책을 쓴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절실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청문회 스타’로만 알고 있지 이런 점은 잘 기억해 주지 않는다. 사실 요즘은 그것만이라도 좋으니 기억만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문장을 끝맺으면서 쓴 말줄임표에서 그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치인에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난다는 건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다. 불과 8년 후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유력 정치인이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하면 잘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는 그랬다. 1994년은 그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그는 단숨에 유명 정치인으로 주목받는다.
자신의 첫 대정부 질문에서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고발하고,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5공 청산 청문회 자리에서 군부 독재의 주역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퍼붓는 모습이 그를 ‘청문회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4년 뒤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했다. 책이 나왔던 1994년엔 돈 때문에 쪼들리면서 겨우겨우 부산에 있는 지구당 사무실을 유지해가는 처지가 된다. 1년 넘게 당 최고위원이 내야 하는 당비도 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사실 그가 첫 책을 쓰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돈’이었다.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청문회 직후에는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는 우쭐하기도 하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책을 팔면 돈을 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솔깃하며 이 글을 쓴다.”
“그래도 쓰는 김에 하고 싶은 말을 좀 하고 싶은데 그런 딱딱한 이야기는 독자들이 읽어 주지 않는단다. 출판사의 주문이 까다롭다. 이건 빼라, 이런 이야기를 넣어라. 어쨌든 팔리기나 좀 팔렸으면…….”
<내게 유리한 판을 만들라>,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 <리치 파머>(공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