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야말로 브랜드를 만드는 최고의 도구인 이유
먼저 한 가지 말하고 넘어갈 게 있다. 나는 그의 지지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이라고 하면 무조건 비난하는 사람도 아니다. 사실 열성 지지자가 되기에도, 극렬한 반대자가 되기에도 나는 너무 젊거나 혹은 어리다. 노무현이 당선되던 해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이 글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정치인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는 건 어떤 종류든 그에 대한 개인적 감정 때문이 아니다.
최근 수십 년 간 한국에서 그만큼 글을 통해 자신의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쌓아나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냈던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변변하게 가진 게 없던 상황에서 글을 통해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저 높이 솟구쳐 올랐던 인물을 만나보자. 이 모습을 살펴보면 ‘글쓰기야말로 최고의 브랜딩 도구’라는 말의 뜻을 보다 더 정확하고, 피부에 와 닿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994년 노무현은 <여보, 나 좀 도와줘>를 출간한다. ‘노무현 고백 에세이’라는 부제와 함께 표지에는 서류 가방에서 쏟아진 잡동사니들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이 90년대 풍의 유머스러운 캐리커처로 그려져 있다.
책 제목 그대로 누가 와서 도와주기만을 바라는 모습이다. 보통 책들보다 작은 손바닥만 한 판형에 230페이지가량 되는 그리 길지 않은 이 에세이집이 그의 첫 책이다.
노무현은 왜 이 책을 쓴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절실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청문회 스타’로만 알고 있지 이런 점은 잘 기억해 주지 않는다. 사실 요즘은 그것만이라도 좋으니 기억만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문장을 끝맺으면서 쓴 말줄임표에서 그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치인에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난다는 건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다. 불과 8년 후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유력 정치인이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하면 잘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는 그랬다.
1994년은 그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그는 단숨에 유명 정치인으로 주목받는다.
자신의 첫 대정부 질문에서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고발하고,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5공 청산 청문회 자리에서 군부 독재의 주역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퍼붓는 모습이 그를 ‘청문회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4년 뒤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했다. 책이 나왔던 1994년엔 돈 때문에 쪼들리면서 겨우겨우 부산에 있는 지구당 사무실을 유지해가는 처지가 된다. 1년 넘게 당 최고위원이 내야 하는 당비도 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사실 그가 첫 책을 쓰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돈’이었다.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청문회 직후에는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는 우쭐하기도 하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책을 팔면 돈을 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솔깃하며 이 글을 쓴다.”
“그래도 쓰는 김에 하고 싶은 말을 좀 하고 싶은데 그런 딱딱한 이야기는 독자들이 읽어 주지 않는단다. 출판사의 주문이 까다롭다. 이건 빼라, 이런 이야기를 넣어라. 어쨌든 팔리기나 좀 팔렸으면…….”
만약 이때 그가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사는 걸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변호사로 일했다면 별 어려움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한때 청문회장을 주름잡았었다는 무용담을 간직한 채 말이다.
그렇게 살다 다시 몇 년 뒤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 당선됐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통령 노무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정치인으로 사는 길을 택한 그는 이 무렵부터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정치에서, 최소한 현실 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세’(勢)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지지해줄 자신만의 세력, 든든한 지지층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국회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다른 대부분의 국회의원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후에도 돈을 벌기 위해 공사 현장을 찾아 일용직 근로자로 일해야만 했다.
좋은 학벌과 여기서 비롯한 든든한 인맥, 그리고 집안의 탄탄한 재력까지 갖춘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하자면 불리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그보다 앞서있던 모든 사람들과 맞서야만 했다.
애초에 남들보다 불리한 조건을 안고 정치에 뛰어든 그였기에 남과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워 이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바로 글이었다.
글을 통해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나가고, 이 브랜드를 바탕으로 자신을 응원하는 지지층을 만들어내겠다고 생각했다.
<여보, 나 좀 도와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신이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지, 정치를 시작한 뒤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활동했는지, 자신의 꿈과 목표는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한 그의 첫 번째 시도였다.
겉으로는 ‘돈을 좀 벌 수 있을 거 같아 책을 썼다’, ‘편안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펜을 들기로 마음먹었다’, ‘잊히고 싶지 않아서 책을 썼다’는 등의 이유를 말했지만 그가 글을 쓴 진짜 이유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최고의 전략가들은 브랜드야말로 자기 자신을 수백 명의 평범한 국회의원들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역대 한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썼던 인물로 꼽힌다. 유려하고 세련된 문체로 대신 쉬운 단어와 표현들로 자신의 생각을 논리 정연하면서도 읽기 편하게 풀어내는 게 그의 글의 특징이다.
그가 단독 저자로 돼있는 책은 모두 일곱 권인데 그중 그가 살아생전에 직접 쓴 책은 <여보, 나 좀 도와줘>, <노무현이 만난 링컨>,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이렇게 세 권이다.
나머지 책들은 모두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평소에 썼던 글들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살아생전 틈틈이 썼던 글들을 모아 여러 권의 책을 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글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울산에 있는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목재에 얻어맞아 이빨이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했던 일도 글쓰기였다.
병원에 있으면서 두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는데 고향집에 보관해뒀던 원고는 잃어버렸다고 한다. 미래에 대통령이 되는 인물이 20대에 썼던 소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하다.
글 쓰는 일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그가 낙선 정치인이었던 자신의 처지를 역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글을 택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즐겼던 만큼 글이 갖는 위력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여보, 나 좀 도와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 ‘기존 엘리트 정치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물이다’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바보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그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 글은 올해 연말에 출간될 '최고의 리더는 왜 글을 쓰는가'(가제)의 원고입니다. 뉴스레터 <홍자병법>을 구독하시면 출간될 책의 원고는 물론 깊이 있는 고급지식을 일주일에 한 번 메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만 입력하시면 바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먹고삽니까?”
이 책의 첫 문장은 이 외침과 함께 시작된다. 그에게 10여 년 동안 두고두고 부끄러움과 후회를 남겼던 한 마디였다. 그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사기 혐의로 구속된 남편의 변호를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구속되기는 했지만 사실 사건은 별 게 아니었다. 당사자들끼리 잘 말해서 합의만 되면 재판까지 갈 필요도 없는 아주 사소한 사건이었다. 변호사인 그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마침 그때 돈이 떨어져서 쩔쩔매던 노무현은 모른 척 사건을 맡는다. 일단 피의자를 찾아가 만나면 의뢰인이 사건을 취소한다고 해도 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됐기에 아주머니가 돌아가자마자 바로 구치소로 달려가 남편을 접견했다.
다음날 아주머니가 찾아와 당사자끼리 합의를 봤다며 계약금 60만 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노무현은 속으로는 미안했지만 ‘어제 남편을 접견했기 때문에 변호사 수임 규정에 따라 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버텼고 결국 실랑이 끝에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무실을 나간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먹고삽니까?”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서. 울면서 사무실을 나가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한동안 나는 그 일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훨씬 뒤 내가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언제부터인지 그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법정에 서서 주먹을 흔들며 양심을 거론할 때는 어김없이 그 아주머니의 얼굴이 나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고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되고나서부터는, 그 아주머니가 던진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힌 화살처럼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와다. 돈에 탐 안내고 인권변호사로서 오로지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해 온 사람이라고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가 나갈 때마다, 어디선가 그 아주머니가 그 글을 읽고 있지나 않을까. 나는 가슴을 조이곤 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드러내며 용서를 구하는 건 용기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권 변호사, 청문회 스타,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던 그에게 돈 몇 푼에 눈이 어두워 불쌍한 아주머니를 등쳐먹었던 과거를 밝히는 건 더 더욱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의 불행을 이용해 돈이나 우려내는 악덕 변호사를 좋아할 유권자는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 사실을 말한다. 아니 아예 이 과거를 고백하는 걸로 책을 시작한다. 자신의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자만이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부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답게 그는 글에서도 모험을 한다.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털어놓음으로써 오히려 더 큰 믿음을 얻어낸다.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과장하고, 뽐내려는 그저 그런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을 맨 앞에 끌어내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나는 이 한 마디에 담겨 있는 부끄러운 기억을 먼저 끄집어내는 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숨기는 한, 내 삶의 어떠한 고백도 결국 거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글을 읽는다면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에는 단 한 점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 정도 잘못까지 밝힐 정도로 솔직한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돈에 쪼들리던 낙선 정치인이 역전의 발판을 만들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브랜드가 그의 이후 정치 인생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는 한국 정치 역사상 최초로 대중적 팬덤을 만들어낸 정치인이다. 그저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사람에게 끌려서 그를 응원하고 따르는 팬들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선거에서 낙선하고 축 늘어진 채 지내던 그가 불과 8년 뒤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첫걸음은 바로 글이었다.
<내게 유리한 판을 만들라>,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 <리치 파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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