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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주씨 Jul 24. 2022

나무가 나의 소원을 들어준 적이 있다.

나의 꿈 이야기

 우리가 일 년 동안 살았던 서귀포 중문동에는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다는 거대한 나무가 하나 있다. 6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마을을 지켜보던 팽나무다. 남편과 나는 번갈아가며 재준이를 어린이집에서 하원했는데, 내가 하원하는 날이면 우리는 꼭 그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집에 들어가곤 했다. 


서귀포 중문동, 610년 된 팽나무라고 한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나무 그늘 아래에는 기다란 벤치가 세 개나 있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멋지고 큰 나무를 본 일이 없었다. 아무도 없을 때면 벤치에 누워 나무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어, 그냥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는 나무. 나는 이 나무의 넓고 큰 마음이 좋았다. ‘나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나무 아래에서 나무만큼 거대한 사람이 되는 꿈을 꾸곤 했다.


 나무 앞에는 편의점 하나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무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있었다. 나는 나무 그늘에서 쉰 대가로 재준이와 그 쓰레기를 같이 치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쓰레기를 줍고는 벤치에 누워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한테도 뭘 좀 해주면 안 되나. 나무와 다르게 나는 내어주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속이 좁은 나는 재준이에게 서운한 게 많다. 서운한 걸 말하자면, 미안하지만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을 만큼이다. 이를테면 재준이는 생후 10개월에 처음으로 단어를 말했는데, 그때 한 말은 다름 아닌 '아빠'였다. 엄마보다 아빠가 먼저라니! 그날 재준이 아빠는 퇴근을 하고 직접 '아빠'소리를 들었다. 나는 괜스레 심통이 났다. 봐도 나를 더 많이 봤을 테고, 분유도 내가 더 많이 주고, 기저귀도 내가 훨씬 더 많이 갈아줬을 텐데 말이다. 그때가 아마 내가 재준이에게 처음으로 서운함을 느낀 날이었을 것이다.  


 “이재준”

 이름을 불렀을 때 돌아보지 않은 적도 수백, 수천 번은 넘을 것이다. 재준이가 알지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서운했다. 특히 밖에서, 사람이 많은 곳에서 불렀을 때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이 다른 곳을 쳐다보며 뚱한 표정을 지으면 그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나는 졸지에 재준이와 모르는 어른이 되어 재준이의 손을 억지로 잡고 데려가려는 것 같은 모습이 된다. 그런 모습을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 같으면 오해를 당할까 봐 

”엄마랑 집에 가야지, 재준아.” 

같은 말을 하며 손을 더 꽉 잡았다. 아마 그 모습이 더 수상해 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그 많고 많은 서운한 일들 중 가장 서운했던 일을 딱 하나만 말하라면, 나를 부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재준이는 나, 그러니까 ‘엄마’를 부르질 않았다. ‘아빠'는 10개월에 첫 단어로 말했으면서, ‘엄마'라는 사람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부르질 않았다. 살면서, 그것도 어린아이가 ’ 엄마‘를 외쳐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깜짝 놀랐을 때 습관적으로 나오는 ’ 엄마!‘부터 시작해서,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 어디가 아플 때, 심심할 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을 때, 놀이터에 가고 싶을 때 등등. 엄마가 필요한 그 많고 많은 상황이 왜 재준이에겐 없는 것이냔 말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것은, 당해본 입장으로 말하는데 서운하다는 말로는 모자를 정도다. 



 나무에게 뭘 좀 해주면 안 되냐고 투정을 부렸던 그날 밤,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꾸지 못했던 꿈을 꿨다. 재준이가 말을 아주아주 잘하는 꿈이었다. 재준이는 조잘조잘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는

 "엄마, 나는 원래 말을 잘하는데, 그동안은 하지 않았던 거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그런 재준이를 보고 너무 놀랐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엄마는 재준이가 말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놀라지 않았어.”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잠에서 깼다.




재준이가 자폐를 진단받고 나서 3년 만에 꾼 꿈이었다.


 


 꿈이 너무 생생했다. 그래서 나는 재준이가 일어날 때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혹시 꿈에서처럼 재준이가 말을 하진 않을까?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엄마'라고 하진 않을까? 그동안 말을 잘할 수 있었는데,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던 거였다고 하지 않을까? 




재준이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잠에서 깬 재준이는 이전과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변함없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붙잡고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대로인 재준이에게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해야 할 것이 늘 많았다. 내가 맡은 역할만 해도 여러 개다. 엄마의 역할도 하고, 며느리, 딸, 아내, 학생, 친구의 역할까지. 재준이를 키우며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가끔은 글을 쓰는 이 모든 일들을 다 해야 했다. 나는 왜 나에게 이 많은 일들을 시키는 것일까. 나는 욕심이 많은가? 나는 나 자신에게 왜 이렇게 바라는 것이 많을까? 이유는 모르겠다지만, 그냥 이 모든 것들을 다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대한 짐들이 나를 누르고 눌러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던 그때에도, 재준이만큼은 나에게 바라는 게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재준이와 함께 생활하며 얻는 것 중 하나는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는 눈빛’이다. 무뚝뚝한 표정의 재준이의 얼굴을 보며 가끔은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라는 게 없는 재준이의 눈빛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도 다짐한다. 재준이에게 저런 눈빛을 보내줘야지. 재준이에게 바라지 말아야지. 나를 보면 안도할 수 있도록.


 그날도 어린이집 하원을 하고 나무에 찾아갔다. 나는 벤치에 누워 나무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나무. 그냥 찾아오는 나에게 곁을 내어주는 나무. 나는 그런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그때였다. 나는 나무가 나의 소원을 들어줬다는 걸 알았다. 재준이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런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나무는 내가 처음에 바랬던 나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제주도를 떠나온 지 4년이 지났다내가 좋아하던  커다란 팽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한다. 나의 마음속 한편에는  남아있는 나무. 나는 욕심이  때마다  마음 안의 나무 안에서 쉬다 오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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