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나는
어린이집 방학 일주일째, 시리게 아픈 허리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재준이와 24시간을 붙어있어야 하는데 왜 하필 이런 날 허리가 아픈 건지, 눈치 없는 몸이 원망스럽다. 재준이는 언제 일어난 건지 혼자 종알종알 옹알이를 하고 있다. ‘말이 트이려는 건가’ 생각을 하다, ‘아니야. 이런 기대는 하지 말자. 이러다 다시 입을 꾹 닫고 며칠, 아니 몇 달이 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샤워를 하러 간다. 좀 컸나 싶으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아이, 3살 수준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2살로 돌아가버리는 아이. 재준이는 그런 아이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 집에서 종알종알 떠들던 재준이는 입을 닫고 조용히 길을 걷는다. ‘햄버거나 하나 사 먹고 키즈카페에 들어가야지.’ 같은 생각을 하며 걷는데 갑자기 재준이가 입을 뗐다.
“어디가, 포비야?”
‘어디가, 포비야?’ 라니.
아마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재준이가 혼잣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와는 정 반대 방향을 보고, 지나가는 말처럼 ‘어디가, 포비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알 수 있다.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나에게 어디 가냐고 묻는 게 분명했다.
“스타필드. 스타필드에 가서 햄버거 먹고 키즈카페에 들어갈 거야. 우리 많이 가봤지? 챔피언 키즈카페. 키즈카페에서 놀고 아이스크림도 먹을 거야. 엄마가 엄청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알지? 재준이는 초코맛, 엄마는 쌀맛으로 먹을 거야. 우리 맨날 먹는 밥 있잖아. 쌀밥. 엄마는 그 쌀맛 나는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어.”
재준이의 자발어에 흥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재준이는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을 하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멍하니 쳐다보며 걷는다. 그래도 나는 아이가 듣고 있다는 걸 알기에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어디에 가냐고 묻는 건 처음이었다. 어디 가는지가 궁금했구나. 그러고 보니 늘 나갈 때 재준이에게 가는 곳을 이야기해 줬는데,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에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자발어 : 아동이 의도를 담아 표현하는 언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재준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 애착 인형도 직접 만들고, 동화책도 내가 만들어서 인성교육을 해볼 생각이었다. 주변 엄마들에게 육아정보, 교육정보도 얻었다. 아이가 다닐 기관도 열심히 알아봤다. 어린이집, 놀이학교, 병설유치원, 사립유치원, 영어유치원... 아이에게 어디가 잘 맞을지 고민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해줄 수 있는 건 후회 없이 다 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 내 노후도 내가 준비하고, 재준이는 자유롭게 살도록 놔두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이건 마법의 주문이었다. 받지는 않고 주기만 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재준이를 위해 하는 모든 것은 용납이 됐다. 뭘 바라고 그러는 게 절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재준이를 위한 모든 것을 계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준이가 자폐 진단을 받은 순간, 내가 세운 계획들은 한 번에 어그러졌다. 그 계획들은 재준이에게는 하나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여태껏 아이를 키우는데 쓸모없는 것들만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 만큼 서포트해주고, 내 노후도 내가 책임지면 괜찮은 부모가 아닌가 생각했다. 대학에 가는 것,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 같은 걸 바라지 않으면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화 그리고 평등에 대해 아이에게 알려주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은 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장애진단을 받고, 계획에 없던 장애아이를 아들로 만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정말 부모로서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바라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그런데 나는 왜 재준이가 자폐라는 진단을 받고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을까. 하나도 바라는 게 없었다면서. 하나도
나는 생각했다. 사실은 내가 재준이에게 무언가 바라고 있던 건 아니었나. 그래서 자꾸 계획을 세운 건 아니었나. 결과를 내포하지 않는 계획이 있나. 내가 재준이를 위해 세웠다던 계획들은 알고 보면 어떤 결과를 바란 게 아니었나. 그게 아니라면 자폐 진단 외에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재준이를 보며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나는 진정으로 재준이에게 바라는 게 없었나.
아이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며 세우는 계획들은, 사실은 아이의 어떤 미래를 그리며 세우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없다고 했던 나는, 사실 재준이의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년의 시기를 맞은 재준이의 어떤 모습. 그래서 나의 계획에는 없었던 재준이의 미래를 보고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재준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내가 계획해야 했던 것은 재준이의 애착 인형과 동화책이 아니었다. 재준이가 좋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대기업에 취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엄마인 게 아니었다. 내가 재준이를 위해 해야 하는 단 한 가지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었어야 했다. 재준이를 위한 계획이 아닌 나를 위한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나 자신을 아끼고 돌보는 일에 힘써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재준이가 어떤 모습이어도 지켜낼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다. 그래야 재준이가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만을 위한 행복을 찾았어야 했다. 그래야 재준이가 어떤 모습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행복할 수 있다. 내가 행복해야 재준이도 마음 놓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의 행복이 재준이와 관계가 없어야 재준이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모습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진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이제와서야 나는, 재준이에게 정말 필요한 엄마가 되기 위해 나를 돌보며 나에 대한 계획만 세운다.
“어디가 포비야?”
재준이의 말 한마디가 나에겐 너무나 큰 기쁨이다. 그런데 만약 내일이 되어 다시 재준이가 ‘어디가’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될 지라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게 될지라도
그래도 나는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한 계획을 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