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일
내가 보는 책 곳곳에는 재준이가 남긴 낙서가 있다. 이 낙서는 여덟 살과 그 이전 시기의 차이가 분명한데, 여덟 살 이후는 한글, 그 이전 시기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이 흔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대충 그리거나 쓴 것이 없다. 그러니까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그리거나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작품은 시간이 흐르며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작품을 통해 작가의 생각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 낙서들은 재준이 생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그래서 가끔은 책을 펴기 전, 재준이가 어떤 낙서를 남겨놓았을지 기대를 한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데, 최근 재준이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책을 한 장씩 넘긴다. 그러다 그 보물을 찾으면 잠시 감상의 시간을 갖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본다. 작가와 소통을 해보려는 내 나름대로의 방식이다.
재준이 생각의 방향성을 유추해보자면, ‘뽀로로 친구들'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점차 동물의 세계로 시선이 넓어지는 걸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니 요즘 재준이는 ‘동물 흉내'라는 동요에 빠져있는 게 분명하다. 자폐 아이의 관심사는 아이와 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끈이다. 이를테면 관심사를 통해 한글도 가르칠 수 있고, 숫자도 가르칠 수 있다. 조금 더 가서 상호작용까지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재준이의 관심사인 ‘동물 흉내'로 프린트물을 만들었고, 재준이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는 이 관심사를 끌고 가 처음으로 문장을 만들어 써보기도 했다.
재준이와 살며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입으로 하는 ‘말'을 통해서만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각 장애인은 수어를 이용해 소통을 하고, 누군가와는 그림이나 글을 통해 소통을 할 수도 있다. 강아지와 함께 지내는 사람은 강아지의 소통 방법에 대해 알게 되고,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사람은 고양이의 소통 방법으로 소통을 한다. 생각을 넓히면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책에 남겨 놓은 재준이의 낙서도 재준이만의 소통 방법이다. 나는 재준이와 소통하기 위해 낙서를 해석하는 일을 한다. 마치 고대의 인류가 남겨놓은 흔적을 해석하여 그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고고학자들처럼 말이다. 즉, 소통을 하기 위한 목적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나는 재준이를 이해하기 위해 재준이 방식의 소통을 해석해본다.
최근 재준이는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글을 써서 직접적인 소통을 시작했다. 이를테면 나한테 혼이난 날은 '엄마 아야 아파요. 아빠 힘내세요.'와 같은 글을 써서 벽에 붙여놓는다. 나에 대한 서운한 마음, 달래준 아빠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어느 날, 로켓 장난감이 갖고 싶었던 재준이는 '로켓 장난감 재준이'라고 쓴 쪽지(?)를 벽에 붙이곤, 무엇인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마법사 엄마'까지 써서 함께 붙여놓았다. 결국 나는 쿠팡마법을 부려 당일에 배송이 오는 로켓 장난감을 구입해줬다.
재준이도 현실세계와 통할 수 있는 소통방식을 계속해서 개발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서로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다.
자폐인 중 가장 유명한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템플 그랜딘’ 교수는 동물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는 그런 재능을 살려 축사와 도축장을 설계하는 일을 한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의 소 축사와 도축장 절반 이상이 탬플 그랜딘 교수가 설계한 방식을 사용한다고 한다. 자폐인들의 다른 시각과 의사소통 방식은 이렇게 특별한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아직은 서툴지만 재준이처럼 다른 방식의 소통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의 숙명이 되어버렸다. 나는 자폐인과 동물들처럼 본능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을 해보려 노력해본다. 이렇게 재준이와 같이 살며 내가 가진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자폐인과 사는 건, 내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