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강할수록 생각지 못한 곳에서 아군을 만나고 전우애를 다지게 된다. 그 회사에서도 그런 인연이 생겼고, 퇴사 후에도 가끔 만나 인연을 이었다. 약속도 없이 매일 보던 얼굴들을 다시 만나려면, 꽤 많은 공을 들여야만 가능했다. 어렵사리 만난 사람은 나를 포함한 과장 두 명, 대리 한 명 그리고 막내 한 명, 모두 네 사람. 어색함도 잠시, 한마디씩 떠들다 보니 말소리로 술집을 가득 메운다. 저마다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사업을 차려 운영 중인 사람, 이제 갓 퇴사해서 여행 다닐 설렘에 부풀어 있는 사람 그리고 새로 취직한 곳에 만족하는 사람, 모두 더 나은 자리를 찾아낸 것만 같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잊고 있던 옛 회사의 이야기가 섞여 나오기 시작한다. 안 좋았던 일들도 그때는 좋은 안주가 된다. 각자 기억을 꺼내 들어 함께 퍼즐을 맞춰나간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바라보는 시각, 위치, 관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의 순서에 맞추고, 인과 관계를 파악해서 사건을 완성한다.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일목요연하게 험담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회사에서 나를 괴롭히던 소음은 이곳에서 빛을 발한다. 이사의 쓸모없는 말들은 사건을 완성할 중요한 조각이 되곤 했다. 미담이든 험담이든 주인공의 입에서 나온 말이 구체적일수록 이야기는 입체적으로 살아나니까. 신나게 웃고 떠드는 사이로 보이는 막내의 표정이 유독 밝게 보인다. 새로운 곳으로 취직에 성공하고 만족해하는 사람이 바로 막내였다. 그 얼굴을 바라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처음 만났을 때 의욕적으로 모든 일에 매달리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출근이 즐거워 보이기도 하고, 긴장도 없이 점심밥을 두 그릇이나 비우는 모습은 신선했다. 그랬던 사람이 점점 말 수가 줄어들었고, 눈빛이 건조하게 변했다. 과정을 고스란히 봤던 터라 그런지, 나아진 지금의 모습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막내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학대받던 아이가 평범한 가정에 가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행복할 수 있잖아요. 제가 지금 딱 그 상태인 것 같아요."
자신을 '학대받던 아이'라고 자칭한 막내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힘들었을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학대라는 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옆에서 듣기도 괴로운 언어폭력을 하루에도 몇 번씩 당했다면, 과한 표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예상하지 못한 듯이 나는 놀랐다. 마치 막내의 시점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괴로워했던 순간은 누군가가 학대받는 장면이었다. 매 순간 안타까워했지만 그게 다였다. 초식동물이 사자에게 먹히는 순간이 안타깝지만, 자연의 순리라서 어쩔 수 없다고 여기듯이. 의욕이 넘치던 막내가 피폐해지는 과정을 바라보면서도 철저하게 나만 생각했다. 고개를 들지 않고, 귀를 틀어막아 상관없이 굴었다. 나만 아픈 것처럼 억울해하고 분노했다. 철저히 내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을 때, 어쩌면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나에게 막내가 애처로운 도움의 눈빛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방관자, 아니 방조자였다. 불합리한 이야기로 목소리 높여 사람을 눌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 결국엔 나도 포식자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상사와 부하직원을 만나게 된다. 대부분이 포식자이면서 피식자이고, 피식자이면서 포식자이다. 효율을 위해 그런 수직적 관계가 필요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피식자가 '사람'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보인다. 누군가가 학대받는 장면이 익숙해진 것이고, 내가 아님을 다행이라 안도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깊은 곳까지 배어들어 그 모든 게 당연한 일이라 납득하도록 만든다. 그 잔인한 생각은 내가 피식자가 되었을 때 똑같이 되돌아온다. 아프고 억울하지만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곳에서 외로이 고립되도록 만든다. 어느 곳에도 끼고 싶지 않아서 몇 발짝 떨어져 있던 나도 피할 수 없이 피식자이자 포식자였다. 언제 또 다가올지 모르는 불편한 포식자를 대처하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답을 내릴 수 없지만,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좀 더 나은 사회 되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