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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Feb 17. 2019

스포츠가 만든 멜버른의 자유주의 공동체

멜버른에 대한 첫인상은 작은 마을이었다. 도심 지역 CBD(Central Business District)에 고층건물과 크레인이 즐비한 인구 5백만의 대도시지만, 걷다 보면 도시가 마을 단위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로 9개 블록, 세로 9개 블록 규모의 작은 CBD 지역을 걸어 나가면 금방 칼턴(Carlton), 콜링우드(Collingwood), 피츠로이(Fitzroy), 리치먼드(Richmond), 세인트 킬다(St. Kilda), 노스 멜버른(North Melbourne), 사우스 멜버른(South Melbourne), 사우스뱅크(South Bank) 등 교외 도시(Suburb)로 들어선다.    



도심 CBD 지역



사실 우리가 보통 멜버른이라고 부르는 대도시는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다. 멜버른, 정확히 표현해 멜버른 메트로폴리턴 에어리어(Melbourne Metropolitan Area 또는 Metropolitan Melbourne)는 시티 오브 멜버른(City of Melbourne)을 중심으로 31개의 독립된 도시를 묶은 지리적 표현이다. 멜버른 이름이 유래된 시티 오브 멜버른은 CBD와 바로 근접한 독랜즈(Docklands)를 포함한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다.


잘 알려진 대로 호주는 지방자치가 발전한 연방제 국가다. 멜버른이 소속된 빅토리아주의 주정부도 연방정부와 같이 하부 행정 단위에 많은 자치권을 부여한다. 어쩌면 연방제 하에서 대도시 안의 소도시들이 독립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멜버른의 소도시(동네)는 뉴욕과 같이 비슷한 전통을 가진 대도시의 행보다 더 정체성이 강하고 독립적이다. 지역 주민들이 자신과 동네를 동일시할 정도다. 동네 전통이 얼마나 강한지 멜버른 주 사이에서는 태어나서 같은 동네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을 흔히 볼 수가 있다고 한다.


거주의 자유가 보장되고 개방된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서 어떻게 동네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물론 동네를 독립된 도시로 분리한 지방자치제가 동네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현상인 동네 정체성이 공공의 힘만으로 형성된다고 보기 어렵다. 멜버른 같은 강한 동네 정체성은 공공보다는 오히려 풀뿌리에서 올라올 가능성이 높다.


멜버른 관련 소설과 서적을 읽으면 상점가와 주민회 전통이 강한 도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동네에 그 동네의 사랑방 기능을 하는 잡화점, 펍, 음식점이 활발하다. 지방자치 전통이 강하다 보니 주민회가 지역 혁신을 주도한 사례도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멜버른 동네 공동체를 자유주의 공동체로 부르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지역 정부나 공동체 조직에 기반한 공동체는 집단주의 성격을 벗어 날 수 없다. 자유주의 공동체는 주민이 자발적으로, 개인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자유주의 공동체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중요하다. 한번 생각해 보자. 동네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인 중에 과연 몇 명이 지역 정부와 시민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사가 있을까? 대부분의 시민은 지역 상가와 학교를 지원하고 일부는 교회와 같은 종교단체를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시민들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지역 정부는 집단주의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동네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 멜버른 소도시는 무엇을 어떻게 하길래 뚜렷한 동네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MCG)



멜버른에 오래 체류하지 않아도 멜버른의 비결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멜버른을 방문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가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MCG, Melbourne Cricket Ground)다. 말 그대로 영국 연방 국가의 주요 스포츠인 크리켓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이다. 규모가 어마어마 해 관중을 10만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다.


MCG가 국제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이곳에서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이 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버른 시민에게 MCG가 중요한 이유는 단 하나다. 매년 10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결승전 그랜드 파이널(Grand Final)이 열리는 장소.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은 럭비의 변형으로 럭비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업사이드가 없다는 것이다. 공격 시 뒤로만 패스하는 럭비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에서는 앞으로 패스할 수 있다. 크리켓, 럭비, 축구 등 호주인들은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지만 그중에서 가장 참여자가 많은 스포츠가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이다. 관중 수, 입장료 수입, 광고 수입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스포츠를 압도하는 호주의 넘버원 스포츠다.


지역발전 관점에서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이 중요한 이유는 이 스포츠가 지역 스포츠라는 데 있다. 지금은 전국 스포츠로 확대됐지만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AFL, Australian Football League)가 결성된 1990년까지만 해도 멜버른을 본거지로 한 빅토리아 풋볼 리그(VFL, Victorian Football League)가 지배하던 스포츠였다.


현재 총 18개 클럽이 AFL에서 경쟁하는데 그중 무려 10개 팀이 빅토리아주, 9개 팀이 멜버른 광역시 소속이다. 멜버른 31개 소도시 중 풋볼 클럽을 보유한 도시는 칼턴, 콜링우드, 에센던(Essendon), 호쏜(Hawthorne), 멜버른, 노스 멜버른, 리치먼드, 세인트 킬다, 풋츠크레이(Footscray) 등 9개 도시다. 팀과 도시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 밀접하다. 1980년대까지도 리그 규정에 따라 선수들이 소속 도시에서 살고 일해야 했다고 한다.   


AFL에는 팀 성적과 관계없이 항상 많은 관중과 관심을 끄는 라이벌 경기가 많은모두 예외 없이 멜버른 지역 팀 사이의 경기다. 칼턴, 콜링우드, 에세던, 리치먼드 등 멜버른 클럽 중 역사가 깊은 4팀을 블록버스터(Blockbuster) 팀이라고 부르며, 팬들은 블록버스터 게임이라 부르는 4팀간의 경기에 열광적인 성원을 보낸다. 빅토리안 라이벌리(Victorian Rivalries)라 부르는 12개 게임도 유명한데 모두 멜버른 팀끼리 싸우는 경기다.



멜버른 소속 풋볼 클럽

풋볼에 기반한 멜버른 정체성 디자인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신이 아닌데 이렇게 절묘하게 소도시와 대도시 정체성을 디자인할 수 있었을까?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은 멜버른 전체의 정체성을 확립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멜버른 내의 소도시 정체성도 강화하는 지역 정체성 관점에서는 신의 한 수와 다름없다.


멜버른 전체의 정체성이 필요한 이유는 시드니와의 경쟁 관계 때문이다. 멜버른은 작은 도시에서 1860년대 금광이 발견된 후 시드니와 경쟁하는 대도시로 성장한 신흥 도시다. 후발 주기에 2등 도시 특유의 경쟁심을 갖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호주는 한 나라가 아니었다. 현 6개 주는 당시 각각 독립적인 식민지로 운영되었다. 1901년에 이 6개의 식민지를 호주 연방으로 통합하기로 결정한 후, 수도 선정 작업이 시작됐다. 멜버른과 시드니가 수도 유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1908년 호주 정부는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있는 캔버라를 수도로 정해버렸다.



상단 왼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세인트 킬다, 피츠로이, 노스 멜버른, 사우스 멜버른



도시 내 정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이민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멜버른은 유럽 다른 지역의 이민자들이 순차적으로 정착하면서 확장한 도시다. 각 지역이 모국과 계급에 따라 독창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성장한 것이다.


개방성, 정체성, 커뮤니티가 멜버른을 지탱하고 경쟁력을 제고하는 자산이라면 이를 강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자유주의 전통이 강한 멜버른 지도자들은 스포츠에서 멜버른 전체와 소도시의 정체성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방법을 찾았다.


사실 다른 선진국에서도 로컬 정체성을 구현하는데 있어 스포츠가 중요한 기능을 한다. 미국에서는 미식축구(아메리칸 풋볼)가 그 기능을 수행하는데, 금요일은 고등학교, 토요일은 대학, 일요일은 프로 경기를 순차적으로 연다. 고등학교팀은 일반적으로 한 도시의 동네가, 대학팀은 한 도시가, 프로팀은 한 주나 지역이 응원하는 팀이다. 이처럼 스포츠를 통해 각 지역의 정체성을 제고하고, 지역 간 정체성의 균형을 추구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스포츠가 유일한 지역 커뮤니티를 강화하는 방법이 아니다. 지역 축제, 문화 시설, 골목길 벽화도 멜버른 소도시들이 공동체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지역 자산이다. 스포츠만큼 문화도 멜버른 소도시의 개성을 구현하는데 기여한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강화하는 방법이 아니고 강화하겠다는 의지다. 전 세계 선진국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날로 심각해지는 경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로컬 공동체 강화에서 찾고 있다. 커뮤니티가 살아 있는 지역 단위에서 빈곤과 복지, 그리고 개인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교육과 재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역발전을 위해, 지역 간, 개인 간 불평등 해소를 위해 지역 커뮤니티를 강화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정부는 현재 협동조합, 마을기업, 주민단체를 통해 지역사회를 조직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과연 개성과 다양성이 중시되는 탈물질주의 시대에 정부 주도의 커뮤니티 구축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자문하게 된다. 오히려 멜버른 사례가 보여주듯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스포츠를 통해 지역사회를 강화하는 것이 더 자유주의적인 대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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