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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Sep 25. 2020

위대한 평민의 마을

'위대한 평민', 1958년 개교 후 홍성군 홍동면을 “협동조합에 바탕을 둔 마을공동체의 이상이며 유기농업 혁명의 본산”으로 이끈 풀무학교의 교훈이다.     


협동조합과 유기농으로 대표되는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을 중심으로 홍동면은 귀농귀촌 1번지라고 불릴 만큼 자녀를 교육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 소멸 위기에 처한 농촌 마을로는 예외적으로 인구가 늘어나며, 공동체가 운영하는 어린이집, 학교, 병원 등이 다른 마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사회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회 서비스만이 아니다. 풀무학교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자연의 선물가게'의 커피와 주식빵, 풀무학교 졸업생이 운영하는 평촌목장의 요구르트는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다. 밝맑도서관, 채소도서관, 지역센터마을활력소, 느타나무헌책방, 그물코출판사 등 동네에 집적됨 문화시설이 높은 수준의 문화생활을 제공한다.


마을 외관도, 특히 문화시설이 집적된 갓골마을은 친환경 유기농업 마을답게 정원을 야생화와 잔디로 채워서 그런지 프로방스 마을 같이 느껴진다. 생협의 우리밀 무설탕 주식빵에도 유기농 마을다운 건강함이 담겨있다.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면 필연적으로 질문하게 된다. 왜 홍동마을일까? 사실 홍성은 반골기질이 강한 고장이다. 홍성의 반골기질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성이 자랑하는 인물의 면면을 보자. 최영, 성삼문, 김좌진, 한용운 등.


그러나 현대 홍동마을의 반골 역사는 풀무학교에서 시작된다. 풀무학교가 들어오면서 홍동마을은 유기농, 협동조합, 마을공동체가 마을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다. 전국에서 보기 드문 정체성으로 일체성을 이룬 공동체 마을이다.  




풀무학교와 무교회주의 기독교


한국과 같이 물질주의가 강한 나라에서 유기농과 협동조합으로 정체성을 세우고, 더 나아가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학교와 마을이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다. 풀무원, 한살림 같은 전국적인 기업도 풀무학교 운동에서 파생된 것에서 풀무학교의 영향력을 가름할 수 있다.     


풀무학교는 학교, 교회, 마을을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하는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자들이 세운 학교다. 더 정확히 말하면 1907년 평북 정주에서 설립된 오산학교에서 활동하던 무교회주의자들이 월남해 그 전통을 이어간 학교다.  풀무학교의 설립자는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 선생의 조카인 이찬갑 선생과 그가 월남해 만난 홍동면 출신 주용로 목사다. 학교 교사는 주승로 목사의 집에서 시작했다.

     

고등 공민학교로 시작한 풀무학교는 지금도 대안학교 지위를 유지한다. 공동체 안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무교회주의 철학에 따라 권력을 공식화할 수 있는 정식 학교 지위를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무교회주의 공동체의 이상은 학교이면서 교회이고, 동시에 자급자족하는 마을이다. 공부와 신앙과 노동의 완전한 일치를 지향한다.” 풀무학교가 1975년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유기농법도 “오직 생명으로 생명을 키운다”는 무교회주의의 성서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풀무학교 무교회주의자들은 또한 생활운동 중심으로 활동했다. 전반적으로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민주화 운동을 포함한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문화예술 운동과도 거리가 있다. 미국의 히피와 같이, 정치도, 문화도 아닌 생활 운동을 추구했다.       



홍동마을이 왜 라이프스타일 성지인가?     


라이프스타일 관점에서 홍동마을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관적 라이프스타일의 존재다. 라이프스타일을 남보다 더 세련된 부르주아가 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라이프스타일을 소명으로 실천하는 마을인 것이다.     


홍동마을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가? 서구 역사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반문화다. 한국의 기득권 문화에 저항하는 반문화, 대안문화 또는 하위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기득권 문화가 무엇일까? 모두들 한국의 삶이 피곤하다며 그 원인이 획일적인 성공 기준과 행복 기준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어디서 왔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삶의 방식은 서구 산업사회의 성공 기준과 다르지 않다. 산업사회의 엘리트 문화, 바로 부르주아 문화다.     


부르주아 문화의 다른 이름은 물질주의다. 한국인의 85%가 물질주의자라면 한국인의 85%가 부르주아라는 의미다. 기성세대 문화가 부르주아면 그 대안은 무엇일까? 여기에도 언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헬조선, 홀로 살기를 외치며 기성세대 문화를 피하려고만 한다.


부르주아가 먼저 자리 잡은 서구사회 역사를 보면 다양한 하위문화가 부르주아에 저항했고 그중 상당수가 주류문화로 편입됐다.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한다'는 주류로 수용된 하위문화를 보헤미안, 히피, 보보, 힙스터, 노마드로 정리했고, 이 중 하나를 대안적 라이프스타일로 제안한다. 필자는 이 책에서 홍동마을을 히피문화로 분류한다. 자연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을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라이프스타일 강국이 되려면, 홍동마을 같은 대안문화 중심지가 더 많이 생겨야 한다. 현재와 같이 부르주아 문화가 경쟁 없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면, 라이프스타일 혁신에서 한국 사회가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풀무학교는 왜 한국 지성사에서 중요한가?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집필한 김건우는 풀무학교 설립자들이 한국의 정통 우익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우익의 본류는 자유주의 보수주의이며, 이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다. 바로 저자가 학병세대라고 부르는 해방 후 월남한 서북 기독교인들이다.     


출판사 소개문을 읽어보자. "학병세대는 왜 중요한가. 학병세대는 주로 1920년 전후 다섯 해 정도에 출생한 이들로, 실제로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 이름만 들어봐도 쟁쟁하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백낙준,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 김수환, 지학순, 조지훈, 김수영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의 사상적 선배로는 이들 ‘진짜 우익’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등이 있고, 그 후배들로는 천관우, 이기백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선배 세대인 이승만, 장면, 박정희 등과 달리 친일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고, 또한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주로 이북 출신으로 남쪽을 택한 사람들이기에 반공 문제에서도 의혹이 없었다. 실제로 이들은 정치, 언론, 교육, 종교, 학술, 사상 각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기도 했다."     


2017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될 정도로 유명한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사람은 두 그룹이다. 첫째, 지역 창업가다. 우리나라에도 지역발전과 지역 기반 라이프스타일 산업 발전에 헌신한 분들이 있고, 이 책에 소개된 김교신, 함석헌, 류영모, 이찬갑, 홍순명 등 무교회주의 기독인들이 풀무학교, 풀무원, 한살림으로 대표되는 한국 유기농업 산업을 개척했다. 지역에서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에 도전하는 창업가에게는 다소 무거운 메시지를 던진다. 그들의 일이 종교적 신념 수준의 사명감이 필요한 일이라는.     


둘째, 보수의 미래를 설계하는 지식인이다. 비록 진보 지식인이 보수진영을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이지만, 보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부 토론의 단초를 제공한다. 보수진영도 진보진영이 오랫동안 진행한 자유주의-국가주의 내부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진보에 자유주의와 국가주의 분파가 있듯이, 보수에서도 자유주의 보수와 국가주의 보수가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 자유주의 보수와 국가주의 보수의 가장 큰 차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이다. 자유주의를 표방한 학병세대는 당시 권력을 장악한 보수와 달리 공산주의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현시대의 보수주의자도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도에 따라 자유주의와 국가주의 보수로 분류할 수 있다.




P.S. 우려되는 것은 홍동마을의 미래다. 최근 홍동마을에 위치한 느티나무헌책방이 문들 닫았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출판한 출판사이기도 하다. 홍동마을도 예전 같지 않은가? 빨리 다녀와야겠다.


*김건우,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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