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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랴 Dec 27. 2023

많은 것을 완전하게 바라봐야 할 이유

영화리뷰를 보다가 문득 나는 그 영화를 재밌게 봤는데 하는 감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영화가 망작이라고 말하는 영상을 봤다. 설명을 들으며 그분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다시 생각을 해보니 그래도 나는 그 영화를 재밌게 봤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상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에 구체적인 근거도 있었고 확실히 이 분야에 전문가는 전문가라는 생각과 배울만한 부분은 따로 필기까지 하면서 들었었다. 그렇다 해도 내가 느끼던 바를 바꿀 이유는 못 되어서 이건 하나의 의견이구나, 이 사람이 그걸 싫어하는 이유도 분명 있을 거야.


그 과정이 굉장히 부드럽게 넘어가서 순간 흠칫 놀랐다.

나와 다른 의견인, 어쩌면 내가 좋게 보고 재밌게 봤던 영화를 신랄하게 까내리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조용히 내 생각을 바꾸지 않았어도 그분의 의견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건 굉장히 희한하고 신기한 감각이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거나 그의 말에 흔들려서 화가 나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상대도 마찬가지고, 이치에 맞게 옳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의견에 내가 한 말이 아닌 나 자체가 완전히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거나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고 두려운 건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이 부정당하거나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불쾌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어떤 말이나 생각에 영향을 받아 화가 나고 자신이 흔들려서 괴롭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 자신이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거리끼고 불편해하는지 어디까지가 내 선이고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부분이고 허용할 수 없는 부분인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인지 알아야 그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있게 된다. 그걸 남들이 평가하고 정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정해야 나를 여기 오롯이 놔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의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완벽하고 싶어 하는 닿고 싶어 하는 완벽함이란 건 환상이라는 말을 우연히 봤다.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고. 우리는 그렇게 돼야 한다고 세뇌 받은 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때 든 생각이 있었다. 우리가 북한이나 중국을 보며 세뇌당했다고 사상교육을 주입당해서 제대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게 우리가 혹은 나도 포함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가 혹은 조상 때부터 이어져내려온 거대한 틀에 세뇌당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는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되고 조금만 틀려도 리셋 하고 싶어 하고 내가 가진 것들이나 만들어내는 게 완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 가지를 잘하면 생각을 달리해서 그걸 자신의 강점으로 밀고 나갈 수도 있는데 튀어나온 부분을 애써 튀고 이상하고 단점으로 바라보며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라고 강요를 하거나 한쪽으로 튀어나온 걸 못 받아들이며 전체적인 완성도를 육각형이 되게 만들려고 한다. 튀어나오거나 이질적인 부분은 나와는 다른 생각이나 장점 혹은 개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해서 뜯어고쳐야 할 단점과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데 왜 저 사람은 저걸 못 받아들이냐, 지가 뭐 그렇게 특별한데, 하는 말들. 자신들은 다 뜯어고쳐서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뭔데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냐는 이해 없는 시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보여주기식이라도 그렇게 보여야 하고 덜떨어지면 안 되며 아마추어는 빨리 어떻게든 전문가처럼 되거나 그런 시늉이라도 해야 하고 완벽해 보여야 하고 그것들이 말해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불완전하다는 사실뿐이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은 자유의 노예다. 그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위에 자유를 설파하고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하고 역설적으로 지금 자유롭지 않다는 걸 뜻했다.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보여주고 싶다는 건 그럴듯하게 보여야 한다는 건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않다는 말이고 공허해서 계속 채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 안에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완벽함은 이 세상에 없는데도 그걸 추구하고 닥달하고 완벽함의 노예가 되는 것은 행복한가?



완전한 것은 알고 있다. 부족하다고 느껴져도 불완전한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만족스럽게 여기고 지금 이러고 있는 순간 그 자체가 완전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느꼈을 때 완전해지고 충만해진다.



만약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면 우리의 상상처럼 얘는 이게 없어서 못났고 저게 덜떨어져서 별로고 하면서 평가하거나

완벽하지 않아서 못났다는 생각을 안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랬다면 완벽한 천사를 가장 사랑하거나 더 완벽하고 선한 다른 피조물을 따로 만들어서 가장 좋아라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완벽한 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떠한 자식도 하나하나 뜯어보며 얘는 코가 비뚤어져서 이쁘고 얘는 얼굴이 찌그러져서 오히려 귀엽고 얘는 예민하지만 그래서 섬세해서 장점이고 얘는 둔해서 답답하지만 성격은 좋고 하면서 이쁘다 이쁘다 하면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설픈 부분을 귀하게 여기고 어여삐 여겼을 거라는 상상을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완벽하게 안 만들었지. 외롭지 않게 서로 도우며 살아가길 바랐고 그 인간성을 보며 아름답다며 뿌듯하게 바라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게 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의지하고 도우며 힘이 되어 행복하게 살라고 축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을 막 믿는 건 아닌데 그런 상상을 하면 어쩐지 즐거워진다. 우리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양이가 왜 좋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대답했다. 고양이가 못나도 뚱뚱해도 목욕하기 싫다고 땡강 부려도 다 귀엽게 느껴진다. 그냥 그 고양이 자체를 좋아하는 감각을 말하고 있다. 고양이가 완벽해서 사랑하는 건 아닐 거다. 이 웬수, 하면서도 사랑하게 되는 지점이 있을 거라는 말이 하고 싶었다.


부족해서 완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부족한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있다. 완전하지 않은 자체로 행복하면 된다. 완전하지 않은 건 내가 그렇게 바라보고 믿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더욱이 많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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