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믿어라.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고 믿어라
왜냐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믿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키고도 온전한 기억을 가졌다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그러고도 불안해하지 않고 기억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지는 잃어버렸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단지 그 관점에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지 않고 있다. 아직도 부족하다. 여전히 원하는 걸 가지지 못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어. 이것도 못하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라는 생각들에 맞춰져 있을 때가 훨씬 많았다. 한순간만 확 행복하고 말고 싶은 건 분명히 아닐 거였다. 아주 자주 평소에도 일상 속을 보내다가도 풍선 터지듯이 퐁퐁 솟아나는 편이 훨씬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농도가 짙지는 않겠지만 기분이 나쁘다가도 바로 그 순간이 잊히지는 않겠지만 옅어져서 금세 기분이 점점 좋아지고 마는 거였다.
항상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주 작게 행복한 순간들을 끌어들이는 편이 살아가는 데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엄두가 안 날 만큼 커다랗고 좋은 선물상자는 무거우니까 느리게 끌고 오게 되고 그 한순간을 위해 애쓰고 버텨내야 할 일들이 까마득히 힘들다. 내가 좋아하고 행복해할 작고 소소한 일들을 많이 찾아보라는 건 그런 건 만들어내기도 쉽고 버튼 조작하듯이 쉽게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선물이라면 무거워서 낑낑거리고 들고 오는 종류의 것보다는 작고 가벼워서 애완동물처럼 귀를 팔랑팔랑거리며 이름을 불리면 폴짝폴짝 뛰어와 품에 폭 안기는 쪽이 낫지 않나? 게다가 그건 자주 이름을 부르고 껴안을 수 있다. 때로는 어차피 집 안에 있고 거리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부르지 않고도 내 두 다리로 찾아가서 안거나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편하고 손쉽다. 작고 사소한 건 끌어오기 참 쉽다는 얘기지. 얕보지는 마라. 그게 주는 행복들이 작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왜 작고 사소하다면서 ‘행복’이란 이름을 굳이 구태여 붙였겠는가. 사실은 행복이란 크고 거대한 의미를 거기에 갖다 붙였다는 데서 이미 언어유희에 가깝다. 행복은 행운에 맞먹을 정도로 그 자체로 크고 거대하니까.
가끔은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걸 과거에 가지지 못했던 나날들과 감정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서늘하다.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상황인지 알 수 있다. 그 부분들이 채워지지 않았던 내가 얼마나 그게 없어서 힘들었고 초조했었는지를 기억해 낸다면 말이다.
거기에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서 타닥 맞추고 귀 기울여본다면 자신이 가진 선물들이 무수하고 충분하며 많은 것들이 주어져있다는 걸 느끼게 될 거였다. 일상이 특별하다는 걸 이해하게 되어간다면 거기에서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이기고 지고 아니라 이기거나 배우거나 이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성공하거나 경험함으로 지식을 얻게 되거나 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보다 실패를 궁금해하고 결핍에 조용히 끌린다. 그에 담긴 슬픔과 아픔에 공감이 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슬픔과 아픔을 겪지는 않지만 모두가 아프고 슬프거나 그런 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결핍은 자산이 되었다.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들도 멋지다고 바라보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보면 된다. 보통은 내가 아직 닿지 못했지만 저너머가 욕심이 나기 때문에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다. 그게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도 말이다. 그것의 이름은 시작이다. 때에 따라 작고 사소할지라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그것이었다. 그리고 한 번 잘 생각해 봐. 찬찬히 살펴보자. 뒤를 돌아보자. 온 사방이 내가 해낸 것뿐일 거야. 내가 해낸 거 투성이 일 거야. 내 눈높이와 그 사람들 기준치에 못 미친다고 깎아내리지는 말자. 지금까지 살아냈고 버틴 건 분명한 사실이다. 잘하지만 못했을 뿐 아무리 부끄럽고 아무에게도 말 못 할 힘든 일을 겪었어도 우리는 살아냈다.
내가 그 무언가를 못했지만 내가 잘하는 것도 분명히 있었어. 그리고 지금껏 잘만 살아왔지. 숨 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게 내게 필요하다면 거듭 배우고 익히면 될 일. 그게 안된다면 안 하면 된다. 그걸 잘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사람은 혼자서 모든 걸 다 하기 어렵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채우고 보완할 부분이지.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사람 ‘인’도 서로 기대는 모양새였다. 마치 혼자서 모든 걸 다할 수는 없다는 듯이. 애초에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있지 않다는 듯이. 불가능한 걸 너무 오랫동안 바라고 있는 거였다. 그게 불행과 연결이 된다. 너무 자연스러운 수순이니까. 가질 수 없는 걸 가질 수 있다 믿고 그게 없으니까 나는 계속 불행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까지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가 하는 그 말을 멈추기 전까지는.
의미는 처음에는 없었다. 당연하다. 의식이 생기고 의미가 생겼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의미 자체를 의식할 존재 자체가 없었다. 의미는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의식하고 만들어야만 생기는 거기 때문에 내가 의미가 없다고 인식하고 굳게 믿어버린다면 의미 따위 없는 거다. 내가 매개체고. 담을 그릇 자체인 내가 차버리고 박살 내버리고 깨져 있으면 의미가 술술 새어나간다. 항상 순서는 내가 담을 큰 틀인 자기 자신의 모습을 원하는 모양에 가깝게 틀로 만들어내고 그 안에 내가 넣고 싶은 걸 담아야 하는 거기 때문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하지 못하는 나를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야. 멀리서 바라볼 때는 어떤지 몰라도 바로 앞에서 눈을 뜨고 바라보는데도 힘겹고 눈 감고 외면하고 싶은 날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가 없고 밉기만 하면 모를 텐데 마냥 밉지만도 않아서 속이 들끓고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만 같아서… 그 감정을 혐오와 미움으로 일축하고 내 눈에 띄지 않는 깊은 어딘가에 숨기고 싶을 때도 많고 실제로 외면하고 눈을 질끈 감고 파묻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힘겹고 지난하고 고군분투할 뿐인 일들이 어떻게 아름답겠어. 항상 그건 숙제였어. 아직 펴보지 않은 통지서였고.
언젠가는 그래. 사는 게 너무 퍽퍽하고 아무것도 잘되지 않았을 때 정말 죽어버릴 거 같아서 나라도 편이 되지 않으며 정말 아무도 내게 없다고 불쌍하구나 진심으로 동정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나라도 내 편이 돼주기로 마음먹었지. 나라도 좀 불쌍히 여겨주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나까지 싫어하면 너무 불쌍하니까 더 이상 싫어하지 말고 좋아해 보자고 마음을 바꾸던 시기였어.
내가 나를 혐오하거나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일상이 되고 조금 잔잔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졌을 때 누군가와 싸우게 됐고 너 진짜 죽고 싶어서 이러냐고 했을 때 그렇다, 아니다란 답이 안 나오고 아무 말도 안 나왔다. 그렇다고 말하면 정말로 죽고 싶어질 거 같고 아니라고 말하면 사실이 아니란 걸 절실하게 느끼게 될 거 같아서.
시간이 더 지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세요. 란 말을 봤는데 주변 사람을 누굴 먼저 말해야 할까?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해 보다가 다음 말에서 조금 멈칫했던 적도 있었다. 그럼 자기 자신은 몇 번째로 생각하셨냐고. 나는 아예 떠올리지 못했다. 몇 번째에조차 넣을 생각이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는가? 그렇게 노력했는데. 내가 지금 별로 괜찮지가 않구나.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래도 이제는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았다. 연민에 가까웠지만 조금은 덜 싫어하게 됐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가끔은 좋을 때도 느껴졌었으니까. 희망은 부질없는 것일 수 있지만 그걸 믿어야 살아갈 마음이 그나마 생기는 거였다. 그래서 아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다시 해봐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