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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Dec 02. 2018

19- 화가 나다가 문득

 누구는 겪고 누구는 안 겪는 것들이 있다. 어떤 사람에겐 내내 맴돌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자주 뱉는 말이 있다.


 몇 주 전 한인교회에서 들었던 "박 집사님, 김치 더 없어요?"란 말이 그랬다. 김치통이 무거워서 국물이 뚝뚝 흐르는 배추김치를 포기 째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여성들 옆에서 태연히 접시를 두드리면서 김치 더 없냐고 물을 수 있는 투명하고 단단한 흐름이 있었다. 실은 몇 주 째 그 말에 관해 써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화가 났기 때문이다. 써내리다 보니 고발이 되었는데, 그래서 내내 못 썼다. 쓰고 싶은 게 뭔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혼자 서서 핸드폰을 보는데 중국말을 흉내 내면서 다가와 조롱하거나 내가 들고 걷는 재활용 쓰레기를 가져다 버려 주겠다며 따라오는 남성들에게도 투명하고 단단한 흐름이 있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멀리서부터 소리치며 동양인의 긴 눈을 흉내 낼 때도 그랬다. 이 모든 상황들의 중앙에서 화가 솟았다. 나는 고발 말고 뭘 쓸 수 있나.


 누구에게는 보이고 누구에게는 안 보이는 것들, 누구에게는 들리고 누구에게는 안 들리는 것들, 누구는 겪고 누구는 안 겪는 것들의 흐름을 끊기 쉽도록 무르게, 불투명하게 하고 싶다.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이들에게 편들어달라고 이야길 늘어놓는 걸 넘어서.


 조롱당할 때 저들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방법에 관해 곰과 의논했다. 무력하다. 단단한 흐름 속에서 종종 존재로 우스워진다. 존재에의 조롱이 낯설어 자주 화가 났다. 나는 여지껏 뭘 많이 안 겪고 안 보던 쪽에 있었나, 문득 낯섦이 부끄러웠다.


-18.11.26. 조지아, 트빌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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