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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Aug 06. 2023

불치병이라는 '외국병'의 시작과 끝

나는 외국에서 남은 평생 살 거라는 착각을 했다

재미있게 잘 다니던 첫 회사에서의 5년의 생활을 마쳤다.

남편 직장에서의 미국 연수기회로 일 년간 육아를 하며 휴식기를 가졌다가, 기존 회사로의 복귀가 아닌 생애 첫 이직을 택했다. 


그동안 막연히 품어왔던 외국계 회사에 대한 동경이 있어, 아이는 친정 부모님 손에 맡기고 나는 새로운 외국계 회사에서 제2의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외국계 회사에 대한 나의 환상은 와장창 깨져버렸다.



회사 분위기는 마치 80년대 무역회사와 같아 보였다. 사실 80년대 직장생활도, 무역회사도 겪어보지 않아 분위기를 잘 모르겠지만, 군대식 문화와 공공연한 남녀차별,  그리고 일과 시스템의 체계 없음이 공존했다.


아, 그 와중에도 재미있던 점은, 이러한 문화에 미국계 외국기업다운 개인주의 문화까지 섞여있었다는 것이었다.


나의 첫 회사는 최고의 회사는 아니었어도, 자기 계발도 장려하고 다양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노력 여하에 따라 여러 기회를 가져갈 수 있는 조직이었는데, 이직 후 문화 충격이 너무 컸다.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 몸과 마음 모두 망가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직장인 사춘기를 크게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 직장에서는 재미있고 일이 잘 맞아서 스스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나에게 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 회사에 들어왔을까? 내가 원하는 회사의 모습은 무엇인가?"




모든 방황의 시작은 의심과 물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걱정 없이 살 때는 필요 없었던 나를 향한 질문들...


사춘기 중학생처럼 앞날은 깜깜한 터널로만 보이고, 나는 왜 대체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잘 모르는 상황.


그렇게 나에게 질문했을 때의 결론은 '탈출만이 살 길이다'였다.

마침 계열사의 다른 포지션이 열려 있었고, 아는 분의 추천으로 3년 만에 두 번째 이직 겸 '탈출'에 성공했다.




두 번째 이직에서 나의 포지션은, 첫 회사생활 시절부터 동경해 왔던 '아시아 담당자' 역할이었다.

가끔 전 직장에 아시아 담당자들이 방문하면 어찌나 멋있고 당당해 보이던지. 나도 그 자리에 가고 싶다고 꿈을 꾸게 되었다.


고백컨데 그 시기의 나는, 약도 없다는 불치병인 '외국병'에 걸려 있었다.

외국에서 살게 될 거라는 한 치의 의심 없는 자기 확언으로, 남편이 신혼여행 때 "우린 외국에서 살 거니까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가자"라고 했을 때 홀라당 넘어가기까지 했다.


이런 외국병에 단단히 걸린 나에게, 모든 아시아 국가를 담당하며 사람들과 연결되고 해외 출장도 많은 직업이라니!

게다가 꿈꾸던 탈출과 꿈의 직업 두 개를 모두 이루었다니!



성공과 성취도 내가 주관적으로 정의했었는데, 입사 한 달 후 찾아온 패배감과 좌절감도 주관적으로 아주 크게 다가왔다.


같은 일을 하는 나의 아시아 담당자 동료들은 전문가 같아 보이고, 멋지게 일을 척척 해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바닥에서만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영어 하나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어날 때부터 영어를 썼던 동료들이나 고객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엄청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머나먼 호주에 있는 나의 매니저를 붙잡고 그만두겠다며 울며 불며 얘기하기까지는 채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회사생활을 하며 가장 이해되지 않는 동료들이 바로 회사에서 눈물을 보이는 유형이었는데, 그게 내가 되니 웬걸, 눈물이 아니라 나의 바닥까지 보여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매니저와 주변 동료 모두 넌 잘하고 있다, 괜찮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혼자만의 늪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십 년 넘게 앓고 있던 외국병은, 퇴사와 함께 허무하게 치료되었다.

한국에서 30년 살았으면 이제 여러 다른 나라들에서 살아봐야지라는 꿈으로, 그리고 아시아 담당자는 그 꿈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넥스트 스텝이었다. 

하지만 그 꿈의 옷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자괴감에 빠지니,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이유도 없어졌다.




직장인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초반에, 나 스스로와 조금 더 심도 있는 대화를 해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해봤다.


그리고 지금도 직장인 사춘기를 앓고 있는 분들을 위해 대신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왜 그 일이 하고 싶은가요?"

"돈을 못 벌더라도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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