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14

by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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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마리아는 트렁크에 박스 한가득 생리대를 싣고서 약속대로 나를 기숙사까지 태워다주었다. 저녁식사 때와는 달리 마리아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의 기분은 날씨에 많이 좌우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고 숲속의 공기는 착 가라앉은 채 주변의 새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방이 침묵에 감싸였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마리아는 떨고 있었다. 마치 둥지를 벗어난 어린 새처럼 검은 눈이 촉촉해졌다. 나는 룸미러를 통해 조금 전의 마리아와는 전혀 다른 마리아를 관찰했다. 감정기복이 심한 마리아의 혼란을 조금 더 알고 싶기도 했다. 그것이 젊은이의 호기심이라고 해도 나의 연구와 관련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기숙사 앞에 도착하자 마리아는 입구까지 우산을 씌워주려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비에 젖어 박스 한가득 생리대를 들고 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마리아는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자동차의 와이퍼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리아의 손도 헤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내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에서 틈만 나면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텃밭을 일구었고 나는 그녀를 도와 이런저런 허브 수확을 도왔다. 텃밭 한편에는 반갑게도 고추가 자라고 있었고, 나중에 알았지만 가지와 깻잎도 수확하고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올 때 그녀는 무말랭이 반찬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입안에서 오도독오도독 무말랭이가 씹힐 때마다 마리아의 사명감으로 가득한 손끝 사랑을 느꼈다.
나는 몰라보게 살이 빠졌다. 1년 동안 거의 10kg 가까이 빠져서 청바지가 헐렁했다. 음식도 맞지 않았고, 룸메이트와의 생활도 신경이 쓰였으며 무엇보다 언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도이츠어를 하는가 보았다. 가끔 잠꼬대를 하는 나를 룸메이트가 조심스레 흔들어 깨워서 미안해하며 그대로 일어나 앉아있는 날이 있었다.
마리아는 내 손을 잡고 리사이클숍에도 갔다. 헐렁한 청바지가 보기 싫었기도 하고 생리를 할 때 냄새가 날까봐 몹시 신경이 쓰인다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있다가 내가 마음 상하지 않는 한도에서 스커트를 입으면 훨씬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나는 한국이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입장, 그러니까 이쪽이 가엾고 불쌍해서 동정을 받아야 할 입장에 서는 걸 꺼렸을텐데 마리아의 배려는 새롭고 낯설고 순했기에 그대로 따랐다. 그녀는 리사이클숍에서 어울릴만한 원피스를 골라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티셔츠에 청바지를 꿰어 입는 것보다 원피스 한 벌이 편리하다는 걸 느낀 난 계속 원피스를 입게 되었다.
다음은 마리아에게서 화장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녀는 눈화장만 강조한 화장을 선호했는데 마리아가 정리해 준 눈썹에 간단한 눈화장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생겨 타인의 눈을 보고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는 마리아에 의해 아낌없이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엄마와 딸처럼, 혹은 자매처럼 의지했다. 마리아의 배려는 여성으로서 몸에 대한 문제를 공유하고, 아파하며 돌봄에 대한 다년간의 노하우가 응집되어 있어서 아름다웠다. 무상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성장하는 동안 나는 자신이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꽃무늬 원피스에 검정색 쟈켓을 입고 생활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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