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13

by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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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대학생인 대학 도시에서도 나는 혼자였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똑같이 어려웠다. 우체국에 들려 논문 자료가 필요하다고 연락해 온 대학 동기에게 한국으로 국제우편을 보내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지도교수를 만났다. 지도교수의 아내는 한국인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거리에서 지도교수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언제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고 하면서 수첩을 꺼내 약속 날짜를 잡고 초대를 해주었다. 나는 지도교수의 집을 방문할 때 무슨 선물을 가지고 가야 할지 몰라서 작은 은방울꽃 한다발을 꽃집에서 샀다. 다행히 그들 부부는 꽃을 좋아해서 정원에 다양한 화초와 꽃을 가꾸고 있었다.
남의 집에 초대받아서 간 건 처음 있는 일이라 긴장했다. 거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나중에 나의 대모가 될 마리아가 나와서 악수를 청했다. 광대뼈가 나온 그녀의 긴 흑발은 뭐랄까 한국인이기 보다 몽골인에 가까워보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온통 시선이 집중된 것을 아셨는지 지도교수가 내게 와인을 권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은 스테이크 요리가 자랑인 지도교수의 손에 의해 준비되었고 우리는 한국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고 있었다. 열어둔 부엌 출입구로 초록의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파독 간호사로서 남편과는 병원에서 어머니의 간병을 하던 지도교수와 알게 되며 사랑이 싹텄다고 한다. 그녀는 다정한 얼굴로 자신은 요즘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남편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데 갱년기 증상과도 겹쳐서 더 힘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공감하기. 책으로는 배웠는데 실제로 적절한 공감의 언어를 생활에서 배우고 익히지 못한 나는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첫 만남에서 나는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한국을 떠나와서 이렇게 모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도 밤에 잠못 들고 깨어날 때가 있어요. 대부분 가위에 눌려서 깨어나지요. 어렸을 때 의붓아빠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었는데 그 기억은 이제 대부분 지워지고 없는데 독일에 오기 전 있었던 저의 나쁜 행동을 꿈에서 꾸고는 해요. 후회라고 할지. 잘못한 대상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떠나와서 그랬다고 할지. 그리고 한가지 더 있어요. 전 한달에 한번 생리를 할 때마다 통증이 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생리 양도 너무 많아서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겁이 날 때가 있어요. 초면에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건 그렇지만 생리대도 자주 갈아줘야 할 만큼 지나치게 하혈을 해서 어지러울 때가 있어요..”

갑자기 마리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뭐랄까 걱정하고 돌봐주어야 할 대상이 생기면 마리아는 자신의 고통은 잊고 힘이 나는 듯했다. 그녀가 내 손을 덥썩잡으며 말했다.

“내게 솔직하게 상담해줘서 고마워요. 난 이제 폐경기라 대형마트에서 세일할 때 사둔 생리대 한 박스가 창고에 그대로 있는데 정말 잘 되었네. 오늘 돌아갈 때 내가 차로 실어다줄게.”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벌써 일어나서 창고로 향하며 남편에게 창고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식탁에서 와인잔을 홀짝이며 나는 그제서야 식탁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벽난로가 있었고 가족사진이 있었는데 슬하에 자식은 없는지 부부의 사진만 크게 인화되어 걸려 있었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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