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16

by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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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가 아직 스텔라가 아니었을 때, 마치 예전의 내가 잔뜩 긴장해 이 땅에 첫발을 디뎠을 때 위축되고 불안했던 것처럼 그녀는 우리집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남편은 오래간만에 고향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도록 와인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피해주었고 나는 며칠 동안 무기력한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며 억지로 차려입고 스텔라를 향해 기운차게 걸어가 악수를 청했다.

스텔라가 엉거주춤하게 서서 내 손을 잡자 축축하게 땀에 젖은 손바닥이 느껴졌다. 문득 나라면 손수건이나 옷에 손바닥 땀을 닦고 악수를 했을텐데 하고 생각하다 그 생각이 곧 하찮은 감정이라 느껴져서 그녀의 손을 더 꼭 쥐어보았다.

나는 오래도록 고립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하면서 고향에 있는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형제들 중 제일 맏이기에 노모 대신 그들을 교육하고 결혼시키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경제적 지원을 하고나니 정작 나에게는 고향에 돌아가서 정착할 돈이 남아있지 않았다. 드라이만과 만날 당시 나는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비웃으며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드라이만도 두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어머니와 함께 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 간병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우린 몰두할 무엇이 필요했고 그것이 국경을 넘은 사랑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고향에 돌아갈 방 한칸을 구할 돈만 모이면 이제 돌아갈 생각이었고 드라이만은 이제 믿을 사람이라고는 가족밖에 없다고 여기며 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하던 참이었다.

우리 둘이 결합하여 하나의 가정을 꾸리게 된 건 드라이만을 두고 눈을 감기 직전 잠시 동안 정신이 돌아온 드라이만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녀는 생판 모르는 타인의 손길에 의지하여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 이상하게 내 근무 날에는 불안이나 섬망 증세가 있다고 해도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에 잠잠해졌다. 나는 드라이만의 어머니 뒤에 절대 서지 않았다. 제압하려고도 하지 않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화를 낼 때 시끄럽다고 하지 않으며 가벼운 산책을 도왔다. 그날도 이상하게 예민해져서는 화를 내며 휠체어를 이리저리 벽에 부딪히며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호통 치던 어머니는 서류정리를 하던 내가 다가가서 눈높이에 맞게 앉고 손을 잡아드리자 잠에서 깨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런 슬프고 아득한 눈으로 저를 보지 마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나는 그녀의 처지가 수십 년 후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코끝이 빨개졌다. 드라이만의 어머니는 한참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얇아진 피부에다 주름진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두 손목을 잡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체온인지 위로가 되었다.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나 혼자 타향에 뚝 떨어져 생활하고 있던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나 자신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드라이만 부인은 정신은 없지만, 자신의 감정이 누그러지면 타인의 감정을 볼 수 있는 감각이 아직 살아있었다. 강의가 없을 때나 주말이면 드라이만은 어머니를 모시고 외출을 하거나 주변을 산책하다 돌아오고는 했다. 치매 말기에는 그것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 병동에서는 보기 드문 돌봄이었다. 자식이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경건할 수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배웠다. 어느 날인가는 흐린 날씨로 인해 기분이 몹시 불안정했는데 산책을 모시고 나갔다 급히 돌아오는 그를 보고서 내가 이유를 물었더니 어머니가 자신을 못 알아보시고 모르는 사람이 납치를 한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셔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의 티셔츠는 땀에 젖어 있었고 옆으로 빗어 넘긴 회색 머리카락도 땀방울이 가득 맺혀있었다. 휠체어에서 뛰어 내리다 발을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날 내가 본 것은 회색 머리카락의 노신사 대신 엄마를 잃으면 어쩌나 하고 불안에 떠는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나의 돌봄 본능이 발동한 날이기도 했다. 나는 집전화로 그날의 드라이만 부인의 상태를 알려주게 되었고 그는 내 전화를 기다리는 듯했다. 우리는 공통의 화제가 있었고, 협력해야 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더 이상 간호사와 보호자가 아닌 동맹관계에 가까웠다. 급기야 비번인 날은 함께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며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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