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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만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특히 스텔라가 오랫동안 연구해온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하고 모교에서 연락이 왔다는 사실에 나보다 더 좋아한 건 사실이다. 그날 저녁 스텔라는 처음으로 저녁을 먹지 않고 기숙사로 돌아가버렸다. 나와 드라이만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하는 동안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독일에서 살던 선배 부부는 한국에서 입주가 시작된 독일마을로 이주를 했다. 함께 독일에 와서 동고동락 했던 동료 누구누구는 새집으로 입주를 했다더라 하는 소식이 나를 매우 설레게 했다. 곧 정년을 맞이하는 드라이만과 나는 노후는 한국에서 보내기로 약속을 해두었으나 막상 돌아갈 생각을 하니 나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그리운 고향에서 나는 모든 것을 새로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정원의 꽃들을 두고, 부엌 창에서 바라보는 하늘을 두고 나는 떠날 수 있을까. 스텔라와 함께 그냥 이곳에 있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를 위해 배려하느라고 그는 부쩍 늙어보였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한국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학술 모임이나, 1년에 한 번 긴 휴가를 보내러오면 되니까 아내의 고향에서 살아보겠다고 큰소리는 쳐도 나처럼 익숙한 골목이며 상점가나 카페가 그리울 것이었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드라이만이 출근을 하고 나는 텃밭으로 나가 흙을 고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한국에 돌아가지 말고 독일에서 여생을 보내볼까. 만약 스텔라가 독일에 있는다고 하면 기숙사를 나와서 함께 살자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관 벨소리가 났다. 스텔라가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온 것이다. 한숨도 못잤는지 눈밑이 검게 그늘져있었다.
“말씀드릴게 있어서 왔어요.”
“어서 들어와. 아침은?”
“먹었어요.”
“그럼 코코아 한잔 줄까?”
“예.”
우유가 듬뿍 들어간 코코아를 스텔라는 좋아했다.
우리는 부엌 식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스텔라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고 있었다. 밤새 생각해 보았는데 역시 독일에서 연구할 과제가 많아서 자신은 남겠다고 할 것이다. 그럼 난 뭐라고 답을 할까. 알겠다고. 한국에 오면 꼭 우리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스텔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국을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어요. 좋은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 엄마도, 아빠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한국에 이제 볼일은 없을거라고요. 마리아에게도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 같아요. 근데 마리아를 만나고나서 조금 바뀌었어요. 마리아를 통해 돌봄의 차원을 알면 알수록 제가 독일을 오기 전 마음먹었던 그 상태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한국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이 아니라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요. 저는 그 마음을 계속 부정하고 있었어요. 사실은 어떤 한 사건이 기억나서 괴롭기도 했고요.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저는 인혁이라는 친구에게 했던 저의 행동이 폭력적이었고 범죄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어요.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어요. 대체 저란 아이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저를 날 때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저란 사람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모교에서 저를 불러준 건 너무 고맙고, 기쁜 일이에요. 제가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거든요. 많이 두렵고 실패할 걸 알지만, 그래도 새로 시작하게 된다면 마리아와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텔라는 내가 아는 한 처음으로 마음놓고 울었다.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스텔라가 심리적으로 고통받고 억압된 채 유년을 보낸 이야기를 들었지만, 인혁이라는 사람과의 이야기는 그날 처음 들었다.
photo by lam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