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17

by 이은주

18

스텔라와 악수를 나눈 뒤 우리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은 드라이만이 자신의 장기인 스테이크를 준비하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스텔라와 함께 오래간만에 모국어로 대화할 수 있었으나 마땅한 화제가 없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침묵이 몹시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요즘 내 근황을 짧게 설명했다.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남편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과 갱년기 증상과도 겹쳐서 더 힘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스텔라는 스펀지처럼 타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흡수하는 아이였다. 사실 향수병이라기 보다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에 방문한 고향에서 형제들은 내가 돌아와서 그들의 짐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걸 느끼고 돌아와서 병이 난 것이었다. 오랫동안 떨어져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투도 몸짓도 모두 지나치게 거칠어보였다. 아니 사납다는 편이 맞다. 그들은 먹고 살기 바빴다. 먹고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곁눈질하며 경쟁을 하느라 자식 교육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대로 잘 먹고 잘 살려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는 내가 안 보였다. 청춘을 다 보내버린 나이 먹은 누이가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자신들을 보살펴주기를 바랐다. 나쁜 것들. 가슴 속에 쌓이는 비애가 독이 되어 심장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복잡한 내 심정을 처음 만난 아가씨에게 말할 수 없으니 그냥 향수병 때문에 힘이 들고 갱년기 증상도 함께 와서 힘들다고 한 것이다. 어차피 한두 시간 같이 있으면 내 감정기복을 그녀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사의 우울증 처방약은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닥 하기도 싫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만들기만 했다. 이약 저약 바꾸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게 하는 힘이 스텔라에게는 있었다. 그녀가 내 병을 잊게 해주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병 따윈 없었던 것처럼 나를 기운 나게 했다. 그녀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싶었다. 나처럼 시행착오를 겪는 청춘이 아닌 제대로된 청춘을 보내도록 안내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스텔라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는데 첫인상과는 달리 그녀가 서너 살 더 어려보이기까지 했다. 내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등하교길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버스에 흔들렸던 그 시절 말이다. 스텔라의 영혼은 한없이 맑고 선했지만, 가끔 지나친 죄의식과 공포심을 느끼는 듯했다. 가엾게도 극심한 생리통에 시달리고도 있었다. 매달 절망적일 정도의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본 사람은 안다. 생리 때가 되면 얼마나 두렵고 긴장이 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그날 저녁 불쑥 꺼내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저 고국에서 온 여학생의 방문으로만 기억했을 것이었다.

“솔직하게 상담해줘서 고마워요. 난 이제 완경이라 대형마트에서 세일할 때 사둔 생리대 한 박스가 창고에 그대로 있는데 정말 잘 되었네. 오늘 돌아갈 때 내가 차로 실어다줄게.”라고 내가 말하자 스텔라는 당황하면서도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생리대였기 때문인지, 기숙사까지 바래다준다고 했기 때문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비 내리는 밤에 우산을 씌워주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면서도 기숙사 앞에서 생리대 박스를 든 채 내가 운전석에 타고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photo by lambba

keyword
이전 02화너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