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순한 맛

쫄깃쫄깃의 시간

고구마 말랭이

by 꽃반지

새벽 두 시, 오지 않는 잠을 청한 지 두 시간 째다. 줄곧 누워있으려니 눈은 말똥말똥하고 일어나 앉으려니 온몸이 어지럽다. 짬뽕을 시키면 짜장면을 먹고 싶고, 라테를 주문하고 나면 불현듯 스무디가 당기는 평소의 내 모습이 잠자리에서도 발현되누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이러자니 저것이 후회가 되고 저러자니 이것이 퍽 염려스럽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불안했다. 늘 휘청거렸다. 나의 직업이, 나의 연애가, 나의 통장이, 나의 앞날이, 결국엔 나의 모든 것이. 후들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붙들고 살았다. 이렇게 후들거리다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의 삶이 요동치던 몇 해전의 어느 날, 한 언니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평소 제 안에 단단한 심지를 가진 모습이 몹시도 부럽던 그녀다. 이래저래 오가는 말들을 헤집고 언니가 불쑥 물었다. "너 요즘 어때?" 역시 촉이 좋은 언니라니까. 오랜 이야기 끝에 "언니,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하고 물었더니 답이 돌아왔다. "시간은 그냥 흐를 뿐이지. 그 시간 속에서 네가 뭔가를 해야지." 아, 우문현답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그런데 나는 안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래서 넌 지금 뭘 쓰고 있는데? 작가는 되는 게 아니라 하는 거야. 작가라면 뭘 쓰고 있어야지!'하고, 뒷짐 지고 멀거니 서서 하늘의 별만 애타게 바라보는 내게 상큼한 번개 한 방을 날려준 것도 언니다. (그 말에 감동받아 그 뒤로 꾸준히 글 연습을 했다... 면 훌륭한 인간일 텐데 아쉽게도 그 당시의 난 아니었다.)


"시간은 그냥 흐를 뿐이지. 그 시간 속에서 네가 뭔가를 해야지." 하는 언니의 목소리가 문득 생각나, 누워서 우물쭈물하다가 불을 팟 켜고 일어났다. 널브러진 책이며 옷가지라도 정리할까. 고요한 밤, 건조기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만 들린다. 우웅- 잠자리에 들기 전, 손질해 건조기에 넣어둔 고구마다.


2년 전 겨울, 옆자리에 앉은 인턴이 가져온 핸드메이드 고구마 말랭이가 그 시작이다. 촉촉하고 달고 꼬들꼬들한 그놈에게 마음을 홀딱 뺏겼다. 이모가 가마솥 한가득 고구마를 찐 뒤 햇볕에 널어 만들었다는 실한 고구마 말랭이를 겨우내 몇 번이고 얻어먹은 뒤로는, 그 맛을 잊지 못해 매년 겨울 무렵부터 완연한 봄이 올 때까지 부지런히 고구마 말랭이를 만들고 있다. 고구마를 찌고 썰고 말리고... 할머니도 아닌데 귀찮아서 그걸 어떻게 하냐는 주변 지인들의 만류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한번 핸드메이드 고구마 말랭이를 맛보면 절대 다시는 못 사 먹는다. 건조기의 뚜껑을 열어 꾸덕꾸덕 말라가는 고구마의 상태를 확인한 후 자리를 바꿔주었다.


본격적인 나의 겨울맞이

잠이 오지 않는 이슥한 이 밤, 한치의 오차 없이 예정대로 고구마가 말라간다. 흐르는 시간에 그저 몸을 맡긴 고구마 말랭이가 부럽다. 다시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마음이 따끔하다. 나는 흐르는 시간을 그저 흘려버리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고구마 말랭이에 대한 부러움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솟구친다. 인간으로 태어나 고구마 말랭이나 부러워하다니, 칫.


무언가를 타고 어디론가 향할 때면 왠지 안심되고 좋았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달리 뭔가를 하지 않아도 시간에 기대기만 하면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주니까. 그 어디는 제대로 된 곳일 테니까. 어딘지도 모를 어딘가를 향해 불안해하며 애쓰기보다는 그 편이 훨씬 좋고 편해서 무언가를 타는 것을 좋아했다. 버스를, 전철을, 기차를, 비행기를, 누군가의 충고를, 누군가의 지시를, 누군가의 안내를.내 인생도 그렇게 덥석 집어탈 수 있는 것이면 참 좋으련만.


애를 쓰며 살아왔다. 애를 쓰며 이 시간과 노력이 그저 휘발되어 버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잘해보려고 애를 쓰고, 이겨내려고 애를 쓰고, 내려놓으려고 애를 쓰고, 힘을 내려고 또 힘을 빼보려고, 애쓰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버나드 쇼의 유명한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갖다 써본다. '우물쭈물하다가 너 이럴 줄 알았지.' 그래, 난 늘 우물쭈물이다. 카페에 들어서면 주문하고 나서도 몇 번이나 주문을 수정하고, 잠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잠들지 못하는 지금처럼. 깊어가는 새벽, 건조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간에 무임승차하는 듯한 고구마 말랭이나 부러워하는 인간이다. 나는.


문득 우물쭈물이 꼭 나쁜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가 있는 것이지. 단숨에 칼을 빼들고 달려가는 것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니까. 우웅- 건조기는 착실하게 돌아가고 다시금 건조대 위에 누워있는 고구마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 녀석도 우물쭈물하는 게 아닐까? 물기 촉촉한 찐 고구마도 아니고 버썩 마른 고구마도 아닌, 쫄깃하고 쫀득쫀득한 고구마 말랭이가 되기 위해서. 너도 어쩌면 흘러가는 시간에 기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걸까?


잠깐. 우물쭈물한 결과물이 고구마 말랭이라면 나쁘지 않은데? 나는 확실성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니까. 물기 촉촉 찐 고구마도, 바삭한 고구마칩도 아니지만 우물쭈물하면서 시간에 기대 한 발 한 발 나아갈 뿐이다. 그렇지만 우물쭈물하면서 고구마 말랭이처럼 맛있는 인간으로 자라고 있다니 퍽 위로가 된다. (게다가 여느 고구마 요리에 비해서 고구마 말랭이의 인기는 단연 압도적이지 않은가!) 고구마 말랭이를 질투하다가 이젠 인생의 롤모델로 삼다니.


고구마 말랭이는 쫄깃쫄깃하다. 딱딱해서 툭 부러지지도 않고, 연해서 씹을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스르륵 사라지지도 않는다. 잘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것처럼 이어진다.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인생은 얼음처럼 딱딱 부러지는 느낌도 아니고, 연두부처럼 꿀떡 넘어가는 느낌도 아니다. 그저 쫄깃쫄깃하다. 매 순간이 뒤엉키면서 계속될 것처럼 반복된다. 쫄깃쫄깃하려면 우물쭈물해야 한다. 쫄깃쫄깃의 세계에는 확실함이란 없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면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나아갈 뿐이다.


뭐야, 그럼 나야말로 인생을 꽤나 잘 사는 사람이잖아. 안심이다.


새벽 세시가 넘었다.

인간 고구마 말랭이는 이만 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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