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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나지행 Nov 16. 2019

#4. 세상 참 만만치 않아...

산 넘어 산 넘고 또 산이로구나...


뭔가 파이팅을 외치며 시작된 나의 도전은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심한 상처들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을 일로 잡아 시작을 한 거였으니

짧은 시간 동안 급작스럽게 준비해 나가는데에서 미흡한 부분도 많았고, 사업장의 위치상으로 경쟁에서 이기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팀이 없었고, 멘토도 없었다.

뭔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몰입을 하려고 시작한 것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대표들의 숙명이라는 그 외로움을 처절하게 느끼면서 나의 하루하루는 가슴이 뻥 뚫린 상태에서 눈앞의 목표만을 생각하며 지나갔다.


그래도 내가 일에 꽂혀서 다행이다 


초반에는 매일 친구들이 찾아왔고, 동료들이나 선후배들도 참새방앗간 들르듯이 왔다 가곤 했다.

그 북적거림이 좋았다. 하지만 늘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영혼이 떠있는 느낌?

오랜 사랑이 아주 깊은 상처로 끝난 후 새로운 시작은 나도 모르게 그 공허함 들을 누군가가 채워주었으면 하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매우 많은 시기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그때를 거슬러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빛 좋은 개살구였을 뿐. 아주 처절하게 외로웠던 시기이다.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다


유리 멘털을 간직한 채 강남 한복판에서 대표라는 탈을 쓰고 사람을 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가까운 선배들은 나를 종종 찾아와 대표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마치 메뉴얼이 있는 듯 나에게 행동을 바꾸고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건넸고 뚜렷하게 사업적인 나의 가치관이 정립되기 이전의 나로서는 갈대가 흔들리듯 하루에도 수십 번의 혼란스러움들이 왔다 갔다 하였다. 어느덧 내 얼굴에는 가면이 씌워졌다.

나의 약함을 나의 무지함을 감춰줄 아주 단단한 가면이...



그 가면이 생긴 이후로 나의 내면의 삶은 점점 더 공허해져만 간다

날이 갈수록 인맥은 커져만 가는데 사람 없는 외로움이 느껴졌고 날이 갈수록 나가는 모임만 많아져 갔고, 과거에 나를 본 친구들은 내가 변했다는 말들까지 하기 시작했다.

순진했던 얼굴을 뒤로 감추고 그렇게 강한 척. 약함을 모두 감추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모습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가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시기였다.



춤이 다시 추고 싶어서 시작했던 것이...

     

일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춤이 다시 추고 싶어서 어느 날부터 여자 댄스팀 멤버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5명의 멤버.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귀하고 멋진 친구들이 함께 해주었고 아직도 고맙고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당시의 나는 진로 멘토링이나 외부 오디션 심사도 많이 했던 시기이다.

연습할 곳이 필요한 남자아이들도 많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하며 나의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함께 연습하는 멤버들이 늘어났다.

어느 날 여자팀 친구들과 함께 나간 행사에서 멀찌감치 우리 남자아이들 팀을 바라보는데 수십 명의 다른 팀의 남자 멤버들보다 비주얼적으로 매우 튄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사업에 꽂혀있던 나로서는

 ‘아! 이 친구들 쓸만한데? 음반 한 장 내면 행사도 더 많이 들어오겠다’라는 생각에 

그때부터는 일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다시 불행의 불씨를 꿈틀꿈틀 키우기 시작한 계기이다.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키우려던 것이 아니라 주변에 연예계 쪽에서 일을 하던 분들이 많았었기에 성원에 힘입어서 하게 된 것이 하다 보니 점점 더 커져버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아이돌 프로젝트가 되었다. 내가 매니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입각한 승패의 좌우는 박대한 자본의 양에서 판가름이 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으나 걷잡을 수 없이 내 어깨에 무거운 돌자루를 선사해주었다

그들의 인생이 걸려있기에 그 부담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나는 점점 외로움의 불구덩이에 늪에 빠지듯 빠져들어 갔다

나를 위로해주는 시간은 오직 나의 강아지 쥴리와 함께하는 시간일 뿐...




하아... 나는 왜 이렇게 인복이 없는 걸까?

     

내가 모자랐기 때문일까?

누구를 믿고 손을 잡아야 하는지 누구를 가까이하지 않아야 하는지 언제나 혼란스러웠으며

무엇보다도 분열을 일으키는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구설도 끝이 없었다.

항상 시끄러웠고 항상 두려웠다.

그때마다 나는 쥴리를 붙잡고 말을 했다.

”쥴리 야.. 언니가 너무 힘들어... “

내가 만든 판이니 모든 원인은 나이다.

남들 원망할 필요 없다.

이 세계가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이겨낼 돈과 수완이 나는 부족했다


지금도 많은 아이돌 제작자나 기획사 대표님들을 많이 만나는데 기업화로 안착한 몇 소수의 대형회사 외의 분들은 너무 힘들다고 토로를 한다. 아니 전문 경영인을 갖춘 기업화되어있는 대형회사들도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게 현재의 대한민국이고 이 세상이다. 작은 시발점으로 Y회사에서 터진 큰 이슈가 된 사건처럼 말이다.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그분들과 같은  짐을 벗은 현재의 나는 그분들이 말하는 심정이 무엇인지, 얼마나 고독한지 잘 알고 있어서 때로는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항상 응원한다.


그래도 그 친구들이 대리만족을 시켜 주었다는 감사함

     

지금의 BTS도 시작은 미약하고 힘들었을게다. 월드클래스 대형가수로 성장하기까지 타고난 천운도 있었을 것이나 무엇보다 받쳐준 기획력과 가장 중요한 그들의 응집력과 노력.


우리 친구들이 첫 앨범을 발매하기 전에 해외 행사를 나간 적이 있다.

장기행사였고 해외에 함께 몇 달을 거주했다.

그때의 그 친구들과 정말 가족처럼 지냈고 함께 고생했다. 

그들이 무대 위에 올라갈 때 나는 그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정도로 같이 호흡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지금도 고맙다.

소녀팬들은 한국에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 회사로 선물들을 보내주었다.


현지에서는 한 번의 행사에 소위.. 터졌다.

다음날 갑자기 늘어난 소녀팬들이 어딜 가든 우릴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고 심지어 트위터 파파라치까지... 우리는 현지에서 방송과 작은 콘서트까지 급작스럽게 열게 되기도 한다.

활동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우리 팀 멤버들이었는데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나의 개인 번호를 알린 적이 없는데 핸드폰으로 카톡 하나가 왔다.

"unnie~i love you"

나는 누구냐고 답을 보냈고 그 아이는 현지 소녀팬 중 한 명이었다.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냐고 하자 sns를 파헤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톡을 다시 보낸다.

"sorry~ unnie saranghaeyo. unnie.you are my idol"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에피소드이다.


이렇듯 내게 고독과 불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로웠지만 우리 나름의 응집력이 있었다고 믿는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앨범을 내고 활동을 시작할 때는 당시 장기 해외 행사를 같이 하던 멤버들이 약간 변경되어 재구성되었지만, 장기행사를 함께한 그 아이들과의 추억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고통과 힘들었던 기억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추억의 책장 속에 고이 간직된다.


이전 04화 #3. 인간은 철저하게 간사한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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