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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정신의학과에 방문한 지 며칠이 흘렀다.
나는 다른 병원에도 가보고 싶었다.
신체적인 이상에도 병원마다 진단과 처방이 다르니까
다른 병원에 가서 동생의 심리와 동생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또 다른 시각의 전문가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동생과 터 놓고 대화를 할 수 없으니,
당장 동생이 달라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었다.
이번에 간 병원은 검색 포털 상단에서 찾은 곳이었다.
원래 광고를 하는 병원은 가지 않는 편이지만 병원 가기 전에 후기를 살펴보았고,
병원이 현재 위치로 이전하기 전부터 다니기 시작해 몇 년째 진료를 보고 있다는 후기,
상담과 치료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후기,
선생님이 따끔하게 질책을 해 주시기도 한다는 후기가 마음에 들어
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았다. 이번에도 방문 사유는 우울감이었다.
병원에서는 병원 방문 전에 꼭 완료해 달라며 정신 건강 테스트를 위한 링크를 보내왔다.
‘나의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와 같은 질문들에 ‘그렇다’를 체크했다.
내가 치료받을 만큼의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지 않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지만
전문가로부터 동생을 이해할 실마리를 얻고 싶었고 진료 방향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싶었기에
꽤 많은 수의 질문에 답을 선택하는 노력쯤은 해야 했다.
병원에 도착해 15분쯤 기다린 뒤에 진료실로 안내를 받았다.
동생의 자살시도, 거짓말,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의사에게 말씀드렸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는 의사의 말에 생각지도 못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의사라지만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울고 있는 나 스스로가 당황스럽고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왜 당신의 앞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짧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나 보다.
의사는 진료 중 전화를 받았다. 접수대 간호사로부터 아마도 대기하는 다음 환자가 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내가 심리 검사를 했으니 결과를 알려주겠다며
나는 현재 우울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진료를 서둘러 끝내길 원하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오니
한 환자가 대기시간이 길다고 불만을 표출하며 접수대 간호사분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 진료를 서둘러 끝내려는 이유가 이 환자때문이었군’ 생각하며 병원을 나섰다.
나는 며칠 뒤 다시 같은 병원의 같은 의사 앞에 앉아 있었다.
이전 진료 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느라 진료시간을 다 쓰고
동생에 대한 의사의 진단, 가족이자 언니로서 내가 어떻게 동생을 대해야 하는지와 같이
정작 내가 듣길 원했던 얘기는 미처 다루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에게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동생이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우울감 같은 게 있다고 얘기했었는데,
성격적으로 우울하거나 우울증에 잘 걸리는 사람도 있나요? “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동생을 직접 진료를 하지 않아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아마 언니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 있었거나 우울증을 촉발시킨 요인이 있을 거예요.
아까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화목한 가족이었고 평범하지만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고 말씀하셨지만,
동생이 느끼는 바는 달랐을 수 있어요. “
“동생이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진료를 잘 받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동생을 잘 타일러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다그치듯 말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까요.
‘병원 진료를 잘 받고 있는 거니? 언니는 네가 정말 걱정이 돼서 그래.’ 처럼요.
그런데 언니분께서 이렇게 혼자 병원에 오시지 말고,
동생을 잘 설득해서 함께 동생이 진료받는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어떠실까요? “
나도 그러고 싶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동생이 극구 혼자 가겠다고 해서요. “
“저는 언니분이 이렇게 혼자 병원에 찾아오실 게 아니라, 동생과 대화를 하시려고 노력하시거나
동생과 함께 동생이 진료받는 병원에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동생이 서른이 넘으셨죠? 서른 넘은 사람이 자살하고자 마음 먹으면 5분만 떨어져 있어도 할 수 있어요.
동생은 동생 인생을, 언니는 언니 인생을 살아야죠. 언니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어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까요? “
“그야 제가 가족이고 언니니까…”
“부모님이 책임지실 수도 있는 문제죠.”
부모님께 동생 문제를 떠넘기고 나면 나는 마음 편할 수 있을까?
의사는 마치 가족이 없는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의사에게 ‘당신 가족이 내 동생과 같은 상황이어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의사의 말이 너무나도 차갑게 들려 화가 났고 이제 두 번째 본 의사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우습지만, 섭섭함을 느꼈다.
나는 내가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들 때, 상대의 말과 행동에는 어떤 저의나 배경이 있을까 생각해 보는 습관이 있다.
좋게 생각하면 의사로서, 고군분투하는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그렇게 말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처럼 나 스스로도 동생 때문에 나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동생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과거에 했던 것처럼 나와 가족들에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동생을 끊어내는 게 나 스스로를 살게 하기 위한 선택일까?
그러나 동생을 외면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가족이 내 울타리라고 생각해 왔던 내가 과연 그런 선택을 하고도 마음 불편하지 않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의사의 냉정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에 속이 상한 채로 씁쓸함을 느끼며 그렇게 두 번째 진료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