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빈둥거리던 나는 난데없이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딱히 급한 일도 아니지만 미루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 항상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자를 바라보았다.
플라스틱제의 싸구려 독서대 위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과 공책이 세워져 있었다. 등 부분이 파란색으로 마감되어 있는 샛노란 색의 공책의 표지에는 기린이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잡화점에서 그 공책을 발견하곤 홀린 듯이 구입한 후 간간이 책을 읽다 느낀 점을 기록하는 데 사용하곤 한다.
그나저나 책을 이틀 만에 완독하다니, 보통은 책을 다 읽는 데 나흘은 걸리는 나지만 이번엔 달랐던 것이다. 기분이 좋았던 건지 책의 내용이 좋았던 건지. 아마 둘 다겠지. 두 달 전 가을에 산 작은 크로스백에 책을 욱여넣으며 불편할 텐데도, 고심 고심한 끝에 고른 귀여운 가방이라 불평은 딱히 하지 않으며 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추위를 잘 타는 나지만 오늘은 장갑을 끼지 않고 패딩 점퍼만 입고 집을 나섰다. 딱히 장보고 돌아올 것도 아니니 손은 주머니에 넣으면 된다.
도서관은 집과 사이에 있는 공원을 가로지르면 된다. 최근 이사를 한 탓에 이 공원에 오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맞은 공원이 썩 낯설어 벤치 뒤쪽의 조형물을 자세히 보기 위해 잔디 위로 살짝 올라갔다. 철인지 스테인리스 인지로 만들어진 조형물은 삼 미터쯤 되는 높이에 네모나고 기다란 막대를 반바퀴 꼬아놓은 것 같이 생겼는데 뭘 의미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조형물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지 납득하며 도서관까지 가는 길에 있는 조형물들을 일일이 탐색하며 걸었던 것이다.
그땐 그랬던 것이 오늘은 공원의 볼 것들을 다 무시한 채 도서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나 자신을 깨닫고는, 역시 사람이란 이리 빨리도 지겨워하고 적응하는 것인가 하고 자조적인 생각을 했다. 결국은 나도 인간이라는 거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열심히 걸어 도서관에 도착했다.
책을 반납하고 반납했던 책을 빌렸던 자리에 똑같이 섯다. 같은 작가의 책을 빌리기 위해서이다. 다작을 하기로 유명한 이 작가는 책꽂이의 세 칸이 몽땅 자기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나는 또 적잖이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가의 여러 책들을 살펴보다 '미스터리 코미디'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요즘 너무 진지한 것만 봤지 싶어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설까 생각하던 차에 노란 표지가 인상적인 책을 발견해 무심결에 그 책을 꺼내어봤다. 대략 훑어보니 단편집인 것 같았다. 가볍게 보기엔 딱이지. 결국 나는 이 작가의 책을 두 권 빌려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왔던 길을 고스란히 돌아온다. 반대로 걸어오다 보니 출발할 때는 몰랐던 석양의 눈부심이 얼굴을 정면으로 때린다. 굳이 눈길을 피하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내 움직임에 따라 점멸되는 석양빛을 즐기며 공원과 집을 잇는 작은 다리까지 왔을 때, 나는 어제 장 보기에서 마늘을 사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낙심했다. 어쩌지? 요리책에는 분명 마늘을 넣어야 한다고 적혀있는데. 하지만 칼바람이 귓불을 앗아가려는 이 날씨에 마트에 들러 집에 가려니 덜컥 귀찮음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준비하던 요리가 애초에 돼지고기 '갈릭'버터 찜 아닌가. 요리의 주인공을 빼먹을 순 없지. 평소 애용하는 마트는 일 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곳인데도 저렴한 가격 때문에 굳이 걸어 걸어 애용하고 있지만, 고작 마늘 한 줌 때문에 거기까지 걸어가려니 도저히 발길이 안 떨어진다.
그리하여 나는 집에서 가깝지만 썩 저렴하진 않고 시설도 보통인 슈퍼마켓에 가게 되었다. 간판은 마트라고 해놓았지만 그저 슈퍼마켓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는 이 작은 가게는 단지 옆에 아파트 단지가 있기 때문에 운영이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가며 2,218원짜리 마늘을 골랐다. 이러면 십 원짜리가 가방에서 짤랑거리겠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다소 의욕 없어 보이는 계산대 직원에게 2,300원을 주자 열심히 십 원짜리를 집어 내게 돌려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요즘 시대에 동전을 거슬러 주는 것도 고역이겠군'이라고 생각했다.
빌린 책 덕분에 가방에 공간이 없어 마늘은 왼쪽 주머니에 찔러 넣고 또 성큼성큼, 집을 향해 걸어갔다. 토요일에 우편물이 올 리가 없지만 습관적으로 우편함을 확인하고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왔다.
온도차로 인해 뿌옇게 된 안경을 일단 벗어놓고 방에 들어와 가습기를 켰다. 빌린 책 두 권을 가방에서 꺼내 한 권은 독서대에 세워놓고 나머지 한 권은 내 책들과 같이 꽂아 놓을까 했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사람들 손을 많이 탄 책을 같이 놔두기는 썩 석연치 않아 책꽂이 옆 바닥에 적당히 기대어 놓고 일어나서는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습도가 오십오 퍼센트 밖에 안된다고 표시되는 내방은, 한 시간 전 집을 나설 때와 변한 게 없었다. 나는 단 한 번의 외출을 위해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머리를 빗고, 가방을 챙기고, 공원을 가로지를까 돌아서 갈까, 마늘을 사갈까 말까 같은 많은 선택을 했고 그 선택으로 인해 내 반나절은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 돌아온 장소는 내가 얼마간 사라졌다 하더라도 변함치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 공간은 마치 지난 몇 년간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고,
안경의 서리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