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세이 강좌
일부러 졸업식을 끝내자마자 시작되는 에세이 강좌를 신청했다. 쉼 없이 바로 글 쓰는 모드로 전환하고 싶었다. 모 신문사의 유명한 글쓰기 강좌 중에 하나였다. 나의 휴직의 이유가 교직의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내가 쓰던 일기처럼 자조적인 나만 위로하는 글이 아니라, 조금 더 독자를 위한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첫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이렇게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많았구나 생각했다. ‘잘 쓰는 글에는 힘이 있다.’ 그러기 위해 긍정 표현, 능동 표현을 쓴다라던가 이런 막연한 말에 대한 구체적인 팁들을 배워서 좋았다.
강사 선생님이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게 느껴졌다. 수업 시간을 훌쩍 넘어서도, 쉬는 시간 없이도, 말을 이어갔다. (원래 학생들은 이런 선생님 제일 싫어한다지만, 이곳의 수강생들은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온 것이어서 강사님의 이런 열정이 고마웠다.) 어른이 모습이란 게 무엇일까도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읽고, 배우고, 쓰는 그런 삶이 존경스러웠다.
그래도 가장 많이 남는 건 매주 과제를 제출하고 문우들 앞에서 낭독하는 시간이었다. 수업에는 주제와 분량이 정해진 과제가 있었다. 과제 목록을 소개한다.
1. 내가 가장 멋지다고 느꼈던 장면
2. 어릴 때 내게 일어난 가장 중대한 일은?
3. 내게 인생의 비결을 가르쳐 준 사람은?
4. 내가 좋아했던 장소는? 그게 특별해진 정황
5. 최근 겪은 인상적인 사건이나 사람은?
6. 두 개의 가치관이 부딪친 갈등을 스토리텔링하기
7. 상징이 들어있는 수필
목요일 저녁 마감시간까지 매주 주어진 주제에 대해 고민했고 내 경험을 들춰보았다. 자연스럽게 내가 그동안 더 민감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사고 후 큰 수술을 받았다. 이후 다른 이의 곧은 자세에 대해 선망했던 마음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전보다는 그 부분에 열등감이나 질투를 덜 느끼지만, 글을 쓰면서 그래도 남아있던 부러움이나 스스로를 안쓰럽게 보던 마음도 털어낼 수 있었다.
마지막 과제를 통해 내 삶에 큰 주제가 나의 외할머니였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제 돌아가신 지도 5년이 넘었지만 내 유년 시절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 시절 할머니는 무용도 하셨고,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들이 지금 내가 몸에 집착하고, 원치 않았지만 교대에 간 데에도 기여를 했다. 실은 몇 년 전에도 할머니를 다룬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 지금 내 감정이 덜 들어가서 좋았다. 미웠던 마음보다 이제 할머니의 삶을 좀 더 이해해 보려고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과하게 민감했다. 말과 행동이 아니라 누군가를 미워하고 미움받는 분위기나 공기조차도 불편해했다. 근데 그것이 실은 내가 과거에 외할머니를 많이 미워했고 그래서 괴로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글을 쓰면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하지만 내가 휴직 기간에 쓰려던 글을, 내가 쓰고 싶던 주제를 쓰는 강좌는 아니었다. 대신 내 안으로 들어갔다. 정해진 주제를 하나의 글로 구조화하기 위해 그때마다 생각했고 더듬어보았던 감정이 있었다. 글로 하는 치유 프로그램 같았다. 그리고 하나 더! 덕분에 글이 쌓여서 브런치라는 씨앗을 심었다.
부작용도 있었다. 아는 만큼 주저하게 되었다. 내 글에 빨간펜을 들고 검열하다 보니 쉽게 쉽게 발행하기 어려웠다. 글에도 힘이 들어갔다. 블로그보다 브런치는 (안다 어차피 뭐라고 해도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 혼자 속으로 문턱이 높다고 느껴졌다. 아마 내가 쓰고 싶은 이상은 저 위에 있는데 내 수준은 그걸 넘기 부족해 보이니 망설인 것 같다. 그러다가 후속 모임 문우들을 만나면 다시 자극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에세이 강좌를 하면서 나는 내 주제들을 만났고, 한 편의 글로 정리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