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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Oct 21. 2021

눈물을 되새김질할 수 있기까지 7년




왼쪽 무릎에 커다란 흉터가 생긴 건 중학교 체육 시간이었다. 아마 여름이었으리라. 그날 나는 체육복을 깜빡해서 교복 치마 차림이었다. 장난치고 도망가는 친구를 쫓아가다가 경사진 길에서 발을 헛디뎠고, 뜨거운 아스팔트에 다리를 완전히 갈아버렸다. 무릎뼈를 감싼 얇은 피부가 찢어진 것뿐이라 걷거나 움직이는 데에는 별 지장 없었지만 피가 많이 흘렀다.


며칠이 지나자 상처 자리에는 피딱지가 앉았다. 새살이 돋아나면 떨어지겠지, 했는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는 검붉은 흉터가 그대로 남았다. 피딱지 위로 피부가 덮였나 보다, 짐작하면서 꾹꾹 눌러보니 손가락과 무릎뼈 사이에 끼어 있는 딱딱한 고체가 느껴졌다. 어른이 되면서 피부 속에 박힌 피딱지는 조금씩 작아졌다. 몸이 자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15년쯤 지난 지금은 새끼손톱보다 작은 걸 보니, 시간이 지나면 분해되거나 다시 흡수되는 모양이다.


팔다리에 자잘한 흉터가 많은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이 흉터 저 흉터의 안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목욕탕에서 음료수 병을 깨트려 생긴 오른 발목 안쪽의 짧뚱한 흉터는 이제 잘 만져지지도 않았다. 대학생 때 냄비 손잡이에 덴 오른 팔목의 기다란 흉터도 흐릿해졌다. 아, 흉터도 모양이 변하는구나. 절대 안 없어질 것 같았는데, 사라지긴 하는구나.





아빠의 조용한 눈빛만 떠올려도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나 어느덧 8주기를 앞두고 있다. 그 사이 나와 동생은 모두 졸업해서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힘든 일도, 화나는 일도, 어려운 일도 더 많이 겪었다. 이럴 때 아빠가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내 결혼식에서 아빠 자리는 비어있겠지, 하는 생각도 이제는 꽤 담담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아픔이 많이 흐려진 걸까? 아빠를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나는 깊숙이 묻어뒀던 기억을 들춰내어 이 글을 쓴다. 오래된 상처를 헤집고 덧낸다. 아빠와의 마지막 기억을 어딘가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넣어두고 싶어서. 더 희미해지기 전에 온전하게 간직하고 싶어서. 쓰다가 쓰다가 다시 눈물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고, 도저히 더는 안될 것 같은 순간이면 노트북을 급히 덮어버리는 짓을 반복한다.


이건 미련일까? 아니면 이제는 정말 마지막 헤어짐을 준비하는 걸까.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아빠와의 대화를 혼자만의 반추로 채우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흉터를 더 깊이 파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어서. 그러면서도 어딘가에 그 마음을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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