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이후 나는 휴학계를 냈다. 혼자 남은 엄마가 걱정이기도 했고, 흘러가는 삶을 잠시라도 멈추고 싶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추가 신청 기간을 맞출 수 있었다. 나는 한 달 간격으로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방랑자처럼 생활했다. 엄마와 나는 주말이면 근처 수녀원에서 미사를 드리고, 가끔 공원에서 말없는 산책을 했다. 그 외의 외출은 아빠의 신변 정리에 관련된 행정 처리뿐이었다. 울적하고 조용한 나날이었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병원에서는 진정제와 수면제를 처방해줬다. 하지만 엄마는 약병을 침실에 두지 않았다. 세상이 유난히 고요한 밤이면 나는 불 꺼진 거실 너머로 엄마의 숨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즈음의 공허한 눈빛을 보면 누구라도 엄마가 죽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엄마는 거실에 늘어져서 공허한 눈으로 TV를 볼 때 말고는 책상 앞에 앉아서 무서운 기세로 글을 토해냈다. '쓴다'라는 말로는 그 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 그건 정말 속을 꽉 메우고 들어차 있는 무엇을, 온 힘을 다해 게워내는 행위였다. 엄마는 그 시를 엮어서 아빠의 1주기 예식에 와주신 분들께 1권씩 선물했다. 시집을 받아 든 작은 외삼촌은 복잡한 표정으로 큰 이모에게 나직이 말했다.
⌜누나, 이 책 읽을 수 있겠소? 나는 심장이 떨려서...⌟
엄마는 그 시집에 아빠를 떠나보내면서 겪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의사 선생님의 소견을 듣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 날 충격으로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던 일,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밤들, 실패할 게 뻔한 마지막 심폐소생술에 동의할지 선택해야 했던 순간까지. 시집은 그해 말에 또 1권이 나왔다. 엄마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고 나서도 1권이 더 나왔다. 엄마는 모든 고통을, 시름을, 후회를 종이 위에 쏟아내고 또 쏟아냈다.
엄마가 온종일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한껏 느릿하게 지냈다. 과제, 학점, 동아리, 아르바이트, 대외활동으로 대학 생활 내내 넘치도록 일상을 채워왔지만 그때 돌이켜보니 사실은 다 포기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햇살이 잘 드는 날이면 베란다에 놓은 작은 테이블에서 책을 읽거나 짧은 글과 그림을 끄적였다. 나는 그 메모를 모아서 작은 책자를 만들었고, 친구들과 독립 전시를 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남몰래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 언젠가, 엄마는 자기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으음, 하는 모호한 소리로 얼버무렸다. 우리는 왜 돈도 안 되는 글을 자꾸만 쓸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팽창하는 복잡한 감성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니까. 누군가에게 내 고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그렇다고 누구를 붙잡고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순 없으니까. 예술은 사실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