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와 데이터의 상관관계
베이징에 오자마자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대학교 어학당에 등록했다. 십여 년 만에 다시 학생이 되고 보니 의욕이 넘쳤다. 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워 보내고, 자전거 페달을 굴려 눈썹을 휘날리며 학교에 도착했다. 세 시간이 넘는 강의를 듣고, 점심을 간단히 먹고, 숙제를 하면 아이가 왔다. ‘오늘 숙제가 무엇’인지를 옆 자리 친구에게 매일 캐물어야 하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로 신나는 시절이었다.
금액이 크지는 않았지만 반에서 한 명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조건이 까다로웠다. 성적도 성적이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출석률이었다. 출석률 95%가 넘는 학생만이 장학금 대상자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는 한 학기 내 결석과 지각이 3회 이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대학생이라면 그리 어려운 목표도 아닐 테지만, 나는 공부하는 ‘엄마’가 아닌가. 나만 컨디션 조절을 잘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결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가 아프지 않아야 했다. 나는 장학금을 목표로 아이 컨디션 조절에 최선을 다했다. 별 탈없이 순항하던 중 청천벽력 같은 유치원 공지가 나왔다. 국가에서 요구한 설비를 정비하기 위해 내일부터 1주일 동안 유치원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긴 방학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지한다니… 이런 공산당! 이건 꿈일 거야. 낯선 타국이니 제대로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장학금도 물 건너갔구나 싶어 좌절하며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학교에 데리고 가면 어떨까? 학생 중 엄마 비중이 높은 탓에 아이를 수업에 데려오는 엄마들이 종종 있었다. 내 아이는 여섯 살이라 비교적 어렸지만 혼자 책도 보고 그림도 잘 그리니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험을 감행해보기로 했다. 그림 그리기, 영상 시청, 독서 등 유치원처럼 시간대별로 프로그램을 짜서 아이의 짐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학교로 갔다. 생각보다 아이는 공부하는 엄마들 사이에 앉아서 잘 견뎠다. 나가서 놀고 싶다고 몸을 비틀기 시작하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수업 내용이 귀로 들어오는지, 코로 들어오는지 헷갈릴 정도였지만, ‘마이쮸’에 의지하며 조금 더 버티기로 했다. 김애란 작가가 말했지. 인생을 굴러가게 하는 건 근심이 아니라 배짱이라고. 역시 그랬다. 무사히 시간은 지나고, 나는 결국 장학금을 받았다. 쥐꼬리만 한 금액이었지만 나는 대학교 때 받은 전액 장학금보다 엄마로서 쟁취한 그 장학금이 더 좋았다. 그건 아이와 내가 함께 만든 성취였고, 이제 내 곁엔 공부하는 엄마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아이가 있었으니까.
아이가 유치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울 무렵 짧은 문장을 써보는 숙제가 있었다. 아이의 예문은 이랬다. My dad works hard. My mom reads a book. 일하는 아빠 옆에 공부하고 책 보는 엄마. 그 시절 내가 한 일이라고는 학교 숙제에 허덕이기. 우리 셋은 비슷한 시기에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아이에게 '同学'이자 라이벌이었다. 성조나 발음에서 나보다 월등한 아이에게 나는 종종 새로운 단어를 발음해 달라고 조르곤 했는데 그러면 아이는 신이 나서 알려줬다.
당시 우리는 저녁에 모여서 각자 새로 알게 된 단어들을 나열하며 뽐내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게 참 웃겼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하마(河马), 보라색(紫色), 엉덩이(屁股) 같은 단어들을, 나는 어학당에서 토론(讨论), 단련(锻炼)을, 남편은 회사에서 마케팅(营销), 데이터(数据) 등을 배워왔다. 비슷한 시기에 같이 시작한 중국어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장소와 언어 습득 양상의 상관관계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당시 좀처럼 늘지 않는 중국어는 목에 걸린 고구마처럼 날 옥죄고 있었지만 셋이 마주 앉아 서로의 말도 안 되는 발음들을 역시 말도 안 되는 발음들로 지적하고 “엉덩이를 왜 몰라?”라고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던 아이의 장난기 어린 눈빛에 낄낄거리던 즐거움은 실로 거대했다. 배움보다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베이징 생활 5년 차, 학교는 2년 과정으로 마무리했지만, 나는 여전히 공부하는 엄마로 살고 있다. 매일 중국 드라마를 보고, 원서 낭독 스터디를 하고, 온라인 번역 강의를 듣는다. 매년 돌아오는 아이 학교 <Book Week> 때는 아이 반 중국 아이들에게 중국어로 동화를 읽어 주기도 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책이 재미있다고 손뼉 치며 좋아하던 아이의 친구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 왜 중국어 잘해?”라고 묻던 중국인 엄마, “너 홍콩 사람이야? 발음이 홍콩쪽인데”라고 즐거운 착각을 해 준 친구 덕에 나의 중국어 여정은 조금 더 반짝였다.
가끔 내 공부에 집중한다고 아이 학교 숙제나 준비물을 빼먹기도 하고, 다른 엄마에 비해 살뜰히 챙기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자책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배우는데 최선을 다한다. 학위나 자격증 같은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목표라는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재미있어서 한다. 내가 모르는 저 문 너머의 세계가 궁금해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채송화 쌤이 후배의 질문(=교수님은 공부가 재미있으시죠?)에 수줍게 대답했던 것처럼 진짜 그렇다.
어… 난 좀 재밌어.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지 않니? 내가 왜 뇌를 선택했는데. 하면 할수록 재밌어… 평생 책 보고 연구만 했으면 좋겠어. 내가 이상한 거지?
별생각 없이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갑자기 아는 단어가 귀에 꽂힐 때, 가게 간판에 익숙한 글자들이 많아져서 나도 모르게 읽고 있을 때, 대로 한 복판에서 종이돈을 태우는 것이 이 나라의 오래된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진짜 재미있다. 내가 몰랐던 세상이 갑자기 내게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두 아이의 엄마로 뒤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해 서른여섯에 중국어 교사 임용고시를 패스한 전윤희 작가의 책 <나는 공부하는 엄마다>를 읽었다. 서른다섯이 넘은 나이에 임용 고시에 도전이라니, 그 용기가 멋졌다. 물론 서른다섯에 중국어를 새로 시작한 내가 더 대단한지도 모르겠지만요. 무엇보다 깊이 공감했던 건 작가도 나도 완벽한 엄마가 되기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동안만큼은 모든 것을 잘 해내는 멀티형 엄마가 되기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분명 얼마 되지 않아 나가떨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는, 잘할 수 있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도움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을 괴롭히던 육아에 대한 부담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완벽한 엄마 말고, 조금 부족해도 나다운 엄마, 공부하는 엄마, 그래서 즐거운 엄마와 아내가 되기로 했다.
공부하는 엄마로 살면서 늘 마음에 품고 있는 문장은 두 가지다.
-나는 유능한 엄마보다 충족된 엄마, 남들만큼 하는 엄마보다 남들과는 다른 엄마인 것이 좋았다.
-자식이 엄마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엄마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라.
첫 번째 문장은 임경선 작가의 <엄마와 연애할 때>에 나온 문장이다. 신생아인 심이를 안고 쩔쩔매며 매일 눈물 바람일 때 나에게 '너무 애쓸 것 없다고, 안 그래도 아이는 잘 자란다고, 정말 중요한 건 엄마 자신'이라고 다정히 말을 걸어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하는 죄책감에서 많이 해방됐다. 두 번째 문장은 이유남 교장 선생님이 쓴 <엄마 반성문>이다. ‘어리석은 부모는 자녀를 자랑거리로 키우려고 하지만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의 자랑거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문장인데 내 식으로 조금 바꿨다. 아이의 삶을 내 식으로 빚어내 ‘자랑거리’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힐 때 이 문장을 생각한다. 지금 내가 더 열심히 빚어서 빛내야 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내 삶이라고. 서울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베이징에서 더 정신없이 공부하는 엄마로 살아가는 나를 버티게 해주는 문장들이다.
거창한 무언가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아이는 언젠가 늘 새로운 배움에 열려 있던 엄마를 기억할 테니까. 즐겁게 무언가를 깨우쳐 가는 기쁨과 어떤 환경에서도 성실히 지속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늘 무언가를 배우느라 하루가 짧은 나의 아빠를 떠올리면서 내가 늘 깨어있기를 바람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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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